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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02 주일설교요약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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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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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실 때

성경> 요한복음 21:18-22

 

우리는 때로 내가 원하는 인생보다는 타인에 의해 끌려가는 인생을 살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내가 원했던 곳이 아닌 분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대한 억울함, 답답함, 고민, 갈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고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남은 삶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말씀합니다. 원하지 않았던 길, 원하지 않았던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은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과 베드로 삶을 보면서 우리도 원하지 않는 곳에 있을 때 어떤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 (우리가 현재 있는 원하지 않는 곳은...)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곳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런 질문을 세 번씩이나 물어보십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역시 세 번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이 사랑의 고백을 확인하신 주님은 이어 베드로에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 원하지 않는 곳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가게 되는 곳입니다.

원하지 않는 곳은 가기가 싫습니다. 가서도 정이 쉽게 붙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자마자 떠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더 힘듭니다. 떠나기도 더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올 때도 나의 의지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는 것도 내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떠나는 것은 오게 하신 분이 가게 하실 때 갈 수 있습니다.

 

먼저, 그곳으로 가게 된 이유를 잘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후에 베드로는 주님이 가기를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순종하며 간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그가 욥바라는 곳에 있을 때, 가까운 룻다 성에서 와 달라는 요청이 옵니다. 그곳에 다비다라 하는 구제와 선행이 많은 여제자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룻다로 내려가 죽은 다비다를 살립니다. 10장에서는 이탈리아 백부장 고넬료가 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합니다. 이 요청에 응하는 것에는 큰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이방인이 불렀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충분히 큰 논란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가게 하신 곳이기 때문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는 당시에게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넬료의 집에 며칠을 머물면서 교제까지 합니다.

베드로는 기독교인들이 대 핍박을 받을 때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지도자들의 권고로 로마를 빠져 나갑니다. 하지만 길에서 그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백성을 버리고 가니 내가 지금 로마로 가는 길이다베드로는 크게 회개하고 다시 로마로 들어갔고 그리고 그는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남이 팔을 벌리게 해서, 그리고 띠로 결박해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마지막 죽을 때 요청한 것은 자신은 예수님처럼 죽을 수 없으니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현재의 여러분이 있는 곳이 여러분이 원했던 곳이 아닐지라도 주님은 나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보낸 자리인지 모릅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 (그 곳은)성장과 성숙을 위해 보내진 곳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성장과 성숙은 내가 가기를 원하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몸의 근육이 힘든 운동을 통해 만들어지듯이 우리의 신앙의 인격의 성장과 성숙은 항상 연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말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여기의 인내라는 말은 아래에 남아 있다(UNDER REMAIN)’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생기면 남아 있기보다는 바로 도망을 가려고 합니다. 갈등이 있는 곳은 떠나 버립니다. 직장이 힘들면 그만 둬 버립니다. 상사가 힘들게 하면 그만 둬 버립니다. 성도들끼리 수가 틀리면 교회를 옮깁니다. 그렇게 해서는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될 수 없습니다.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합니다. 성숙합니다. 영적 근육이 생깁니다.

인내의 과정에 가장 큰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사람, 다른 문제에 대한 해결이 아닌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만지심입니다. 우리는 이 인내의 과정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나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교만을 알게 하시고, 성격적인 모난 부분을 발견합니다. 상대가 아니라 상대보다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성장하고 성숙되는 것입니다.

 

3. (원하지 않는 곳은)나 자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곳입니다.

자신의 이후 삶에 대해 들은 베드로는 요한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21절에,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주님의 답은 이것입니다.“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

 

여러분, 우리의 관심이 의외로 나 자신에게 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자주 우리의 정체성을 나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남 떡은 항상 커 보이거든요. 그러니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질적인 비교의식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능력을 죽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올 때까지라는 말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머물게 한다는 것은 여전히 살려둔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상관이냐?’는 것은 신경을 끄라는 말씀입니다. 최종적으로 주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더 해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입니다. “너만 잘하면 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은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데려가신 주님의 계획을 망치게 만드는 핵심 사안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 불평과 불만으로 세월을 보내기보다는 새로은 시선으로 그곳으로 보낸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곳은 어떤 곳으로 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 장소로 보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이 나를 더욱 성장시키시고 성숙시키는 장소로 보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곳에서 비교의식으로 열등감의 종노릇하거나 부러움에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곳으로 보낸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혹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 원하지 않는 곳입니까? 그곳에 데려가신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에게 온전히 이루어져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주후 20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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