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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19 주일설교요약 "빈들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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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7-03-23

본문

제목> 빈들의 영성

성경> 누가복음 1:80 / 찬송> 73, 회중찬양, 397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11:11,새번역)

이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두고 한 말씀인데 이처럼 칭찬과 인정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무엇을 보시고 이런 평가를 하셨을까요? 세례 요한은,

태어난 목적을 잘 알았던 사람이다. 태어난 목적대로 살았던 사람이다.

태어난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 훈련했던 사람이다.

첫째, ‘태어난 목적을 알았던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둘째로, ‘태어난 목적대로 산 사람이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인 것은 안다고 해도 그대로 살아가는 것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신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자신은 깨끗이 물러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요한은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그가 태어난 목적대로 살기 위해 훈련했다.’입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훈련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80)

그는 자라면서 첫째는 심령이 강해졌다는 것과, 둘째는 빈들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빈들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빈들의 영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빈 들의 영성1 - 나 자신의 내려놓음입니다.

무엇을 내려놓는 것입니까?

1)의식주 문제입니다 :

광야는 사람이 살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부족한 곳입니다. 바람과 모래 외에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낮에는 더위를 이겨야 하고 밤에는 추위를 이겨야 하는 곳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모든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어떻게 살았을까? 1:6에는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1:6)고 말합니다. 요한의 의식주 모두가 일반적인 사람과는 많이 다릅니다.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살고 싶은 곳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요일2:16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빈들, 광야는 이런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채워지면 세상을 이길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내려놓게 될 때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2)육신의 정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는 이 문제가 의뢰로 큰 문제였을 것입니다. 육신의 관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생산의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요한입니다. 그런데 이 탄생 기사 이후에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자랐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일찍 부모를 잃고 혼자 자랐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인정에 대한 그리움은 그에게 있어 아주 큰 상처이고 약점일 수 있습니다.(박근혜 대통령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이유에 대한 분석을 할 때 나는 부모의 문제라고 생각) 요한은 그는 빈들에서 육신의 정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였을 것입니다.

3)자신의 삶의 주체성입니다.

저에게 있어 가장 큰 관심은 요한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자신이 태어난 기적 같은 과정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 기적 같은 과정을 통해 태어난 이유가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 자신의 의사와 전혀 상관이 없이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 같은 삶을 강요당하는 것 같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큰 헌신을 나에게는 요구하면 어떻게 하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내려놓는 곳이 바로 빈 들, 광야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곳이 빈들이요, 내려놓는 기간이 영성 훈련 기간입니다. 이 영성이 생기면 우리의 삶에 새 힘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새 힘입니다.

 

빈 들의 영성2 - 하나님으로 채워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내려놓을 때 힘이 생기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빈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빈들과 같은 결핍은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긴급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결핍을 못 느끼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풍성함이 저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결핍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빨리 만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내려놓아 빈 공간에 채워지는 은혜가 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그러면 빈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빈들은 외로운 곳입니다.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혼자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혼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셔서 아내 하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자꾸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이룹니다. 마을이 생깁니다. 도시와 국가가 생깁니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지어서 단체와 교제권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다 혼자가 되기 싫은 인간의 속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만나도 이상하게 허전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허전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와와의 관계를 맺기 전에 우선적인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 되는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들 찾아갑니다. 남자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도 어느 날 빈들을 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기억하십시오. 그 때는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납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예수님 역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과 기도로 사탄을 이기십니다. 마태복음 4장에는 광야에서 금식하셨다고 나옵니다. 금식은 그 자체가 육체를 동반한 영혼의 기도입니다. 5:16에는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5:16)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한적한 곳이 빈들, 광야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 독대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빈들은 결핍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말씀과 기도의 처소가 됩니다.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의 채우심을 시작하게 만듭니다. 누가복음 3:1-2을 보겠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3:1-2)

하나님의 채우심이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그 빈들에서 하나님은 다시 그를 찾아오셨고 그가 가진 모든 갈등을 정리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빈들의 영성이 의미 없는 우리의 삶에 희망의 싹을 트게 합니다. 빈들의 영성을 가질 때 무기력한 우리의 삶은 힘을 얻습니다. 빈들의 영성이 있을 때 알아도 할 수 없었던 우리의 무력함에 동력을 불어넣습니다. 빈들의 영성은 빈들에서 얻습니다. 빈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빈들을 만나면 그곳에서 영성을 훈련하십시오. 내려놓고 채워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할렐루야 아멘.(주후2017.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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