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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27 주일설교요약 "부활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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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6-03-31

본문

제목> 부활의 증거
성경> 요한복음 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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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의 핵심 - 부활신앙
우리에게 부활의 교리는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부활신앙 안에 다른 부수적인 것들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부활교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 분이 부활하셨으면 우리의 죄사함의 문제와 우리의 부활도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바로 우리는 그 핵심적인 부활의 증거를 확인하고 확정하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역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의 첫 새벽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20절을 보면, 마리아는 안식 후 첫 날 일찍이예수님의 무덤으로 출발했고 해 돋을 때’(16:2)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옮길 수 없는 무덤을 막은 돌로 인해 근심이 컸던 마리아는 돌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0:2)
시체가 없어졌으니 시체가 스스로 이동했을 리는 없고 누군가가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질해 갔다는 소문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덤을 지켰던 경비병과 대제사장의 이해관계가 떨어진 유언비어였습니다. 경비병은 책임을 추궁당해야 하는 처지이고, 대제사장은 평소에 예수가 말한 대로 부활이 이루어졌다고 하면 망하니까... 대제사장들은 경비병에게 돈으로 매수를 했고, 경비병은 문책이 두려웠는데 돈까지 받았으니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28)
하지만 스승의 십자가 형벌이 두려워서 도망을 쳤던 제자들이 갑자기 용기를 내서 무장을 하고 있는 군인들을 습격을 해서 스승의 시체를 가져갔다는 말은 말이 안 되고, 설사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용기를 가지고 그렇게 했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그랬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사실 조금만 더 객관적으로 이 사건을 접근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증거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증거들을 보면서 부활을 더욱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부활의 현장이 증거 합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8)
그 다른 제자인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의 현장을 보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5~7절을 잘 읽어보면,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서 본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의인 세마포는 놓여 있고 머리를 샀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뒤에 들어간 요한이 또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고 그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구나!’ 하는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부활의 증거가 될 만한 정황일까요? 우리가 그 현장을 목격했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일까요? 부활의 논거들은 이렇습니다. 시체를 도둑질해 가면서 오히려 돈이 되는 세마포를 벗기고 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히 머리를 쌌던 수건이 헝클어짐 없이 쌌던 그대로 놓고 갔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됩니다.
이 모든 정황은 예수님이 부활하는 순간 그 육체가 수위를 순간적으로 빠져나간 것입니다. 그때 세마포 수의는 그 자리에 내려앉았을 것이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형태를 유지한 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손을 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부활체는 어떤 물리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이 모인 곳에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시고 또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셨던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한 날, 예수님의 무덤 현장이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2. 부활의 증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더욱 확실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살아있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는데 더 이상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법정에는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실로 인정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증언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3-8)
 

3. 변화된 제자들의 삶이 증거 합니다.
아무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하지 않으면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이 뒤집어지게 되면 그 사실에 대한 신뢰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혀가자 이때까지 예수님 믿고 의기양양했던 모습을 사라지고 겁을 먹고 도망가 숨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이 제자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자들이 더 이상 숨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어 이들은 다 이 소식을 전하는데 목숨을 겁니다. 본래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이유는 세상에서 출세해 보고자 하는 욕심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치관이 싹 바뀌어 버렸습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위협이 더해갈 때에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4:20-21)는 이런 대담한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도의 메시지는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그리스도의 부활메시지입니다. 혹시 스승의 시체를 훔쳐가서 살아났다고 헛소문을 퍼뜨릴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거짓 사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기꺼이 기쁘게 이 사실을 위해 목숨도 바칩니다.
 

많은 구전에 제자들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죽을 수 없다고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으며, 안드레는 ×자형의 십자가에서 순교하였고, 야고보는 행12장에 헤롯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야고보를 칼로 베어 죽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처럼 채찍에 맞고 후 십자가에 처형당하였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진 후 곤봉에 맞아 순교하였고, 마태는 돌매질을 당하였으며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바돌로매는 피부가 벗겨져 순교하였고, 도마는 창으로 몸이 관통되어 인도에서 순교하였고, 누가는 올리브 나무에 목이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로마로 송환이 되어 기름 끓는 솥에 던져졌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가 도미티안 황제 때 밧모섬을 유대를 당했고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들의 목숨을 바꿔도 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살아나셨습니다.(고전15:3-4) 하지만 요한은 그 당시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 아쉬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20:9)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믿으면 됩니다.
 

죽기로 작정하고 덤비는 사람은 정말 무섭습니다. 하지만 죽어도 사는 것을 믿는 사람의 담대함은 그것을 능가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담대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주후 2016.3.27.,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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