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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25 주일설교요약 "시온을 기억하며 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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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5-10-01

본문

제목> 시온을 기억하며 우는 사람들
본문> 시편 1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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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7편은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노래에서 한 가지 각오, 결단을 합니다.
나라 잃은 민족이 타국에서 고향 땅을 그리워하면서 부른 노래, 그들이 부른 노래의 가사를 통하여 그가 흘린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어떤 의미일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일상 속에서 - 천국을 기억하며 삽시다.
시인은 지금 이방 나라 바벨론의 어느 강변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것 같습니다. 그는 노역 중에 잠간 쉬는 시간에 바벨론의 강변에 앉았습니다. 그러면 쉰다는 즐거움도 잠시 곧 바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왜 눈물을 흘립니까? 아마도 서러웠을 것입니다. 이역만리 포로로 잡혀 와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으니 서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의 기자는 시옥 기억 때문에 울었다고 쓰고 있습니다.(1)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더라”(1)
사람이 힘들고 괴로울 때 떠오르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적인 안식처입니다. 사람들이 고향’, ‘어머니가 힘들고 괴로울 때 떠오르는 것은 그곳이 나의 안식처라고 생각이 무의식 중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누구나 악을 보면 분을 냅니다. 이것 누구의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면 무조건 사랑합니다. 이것 누구의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이런 요소들입니다.
사람이 고향’ ‘아버지’, ‘어머니라는 단어에 찡~ 할 수밖에 없는 것, 역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존재 근원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 역시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우리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우리의 영혼의 깊숙한 곳에 넣어두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 자신의 고향으로 가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야 하는데 지옥을 갈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들의 고향 시온성,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울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온이 어디입니까?
14:1에는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다고 말하고, 12:22에는 보면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시온산은 천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극도의 힘든 포로생활에 그의 고국, 고향 시온을 기억하고 웁니다. 우리의 힘든 인생길에 잊어서는 안 될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인데 이 공동체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는 곳입니다. 두 번째는 영혼의 소풍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천국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주 여러분의 영혼이 천국을 소풍가시기 바랍니다.
 

2. 결단 - 다시는 천국을 잃어버리지 맙시다.
이 시편을 쓴 사람은 성악이나 기악을 전공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했던 사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가 기억하며 울었다고 말하는 곳이 시온, 곧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절부터 시편 기자는 그가 바벨론에서 겪었던 가장 비참했던 일, 참기 힘들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노래를 해 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3)
그런데 그 노래를 하나님을 위한 찬송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자기들의 기쁨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찬송가를 불러보라고 할 때는 조롱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더욱 모욕적인 것은 찬송가를 부르라고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즐겁게 하기 위해 부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권위, 권력, 위치로 우리의 신앙을 짓밟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여기에는 그는 시온을 잃고 당하는 수치를 뼈저리게 느끼면 다시는 예루살렘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5~6절에서 그는 이제부터 한 시라도 예루살렘을 잊어버린다면 연주를 하는 오른손은 더 이상 연주를 못하는 손이 되어도 좋고, 노래를 하는 혀는 마비가 되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2절에 보면, 그는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습니다. 더 이상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제까지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시온을 향한 노래가 아니면 더 이상 연주하지 않겠다는 말이며 시온의 노래가 아니면 더 이상 부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역으로 이 결단은 더 이상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찬양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천국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시시한 것 때문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적인 것 때문에 거룩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땅의 것 때문에 천국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까?
나는 난 다시는 예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찬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천국을 소망하고 천국을 지향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점검해 봅시다. 아멘. (201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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