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교회채널
 가정교회360
 예배생방송

사역의 지경이 넓혀지는 교회

목장자료실

130206 주일설교요약(목장교사용)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3-02-06

본문

제목>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성경> 마태복음 1:1-17
찬송> 321장
  오늘은 신약성경의 시작인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를 통하여 하나님이 마태를 통하여 주시는, 더 나아가 마태의 의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의도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향한 복음서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혈통적 정통성부터 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예수님의 유대적 혈통의 정통성을 먼저 말한 다음에 그의 생애를 기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다음에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족보를 마치면서 17절에 이 족보의 정리를 이렇게 요약 기술하였습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17)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세 시대로 구별하여 각 시대를 14대로 구분하였습니다. 즉 14대가 세 번 반복된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면 총 42대가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대가 맞느냐?’하는 것입니다.
  14대가 세 번 반복한 것은 마태의 의도적 조합이라고 봐야합니다. 14는 7의 두 번입니다. 7은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날이라며 안식하셨습니다. 유대인은 7일마다 안식일을 맞이하고, 7년마다 안식년을 맞이합니다. 7년을 또 7번 맞이하는 해는 희년이라고 해서 쉽게 말하면 대안식년으로 지킵니다.
이들이 지키는 의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일은 7번 합니다. 물을 부을 때 7번 붓고, 씻을 때 7번 씻고... 그래서 성경 곳곳에는 ‘일곱 번’이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14’하면 잘 모를 수 있지만 14는 7의 두 번이고 14의 세 번은 7의 여섯 번입니다.(☞14*3=7*6) 예수님은 7을 여섯 번 마치고 7의 일곱 번째인 새 시대를 여시는 주인공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희년을 여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마태는 무엇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2. 연약한 자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마태는 예수라는 사람의 족보를 이야기하고 앞으로 이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의 족보에 4명(마리아 포함 5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입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유대사회의 족보에서 여자이름이 족보에 기록이 되어있다는 것은 이 족보가 일반적인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를 가진 족보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남자들의 족보에 여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만도 파격적인데, 더 놀랄 일은 이 여인들이 한 결 같이 문제가 많은 여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먼저, 3절에 기록된 ‘다말’ 그는 시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는 낳습니다.(창35장) 5절에 나오는 ‘라합’은 여기고 성의 ‘기생’입니다.(수2장) 이 여인은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 구원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의 유력한 가문의 사람과 결혼을 하여 ‘보아스’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이어 모압 여인 ‘룻’이라는 여자가 나옵니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지만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여 다윗 왕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습니다.
마지막 한 여인은 6절에, 단지 ‘우리야의 아내’로만 기록되어 있는 여인입니다.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의 아내가 된 이유는 다윗의 간음죄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간음죄를 숨기기 위해 충신인 우리야를 전재터에서 죽게 만들고 그 여인을 취합니다.
4명의 여인들. 첫째로 이 여인들 중에 이방여인이 많습니다. 출신성분도 좋지 않습니다. 이들에 관련된 이야기도 상쾌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윤리나 도덕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이런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나 오라는 것입니다.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전력이 무엇이었는지도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실수를 어떻게 했는지도 이제는 따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 묻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만은 따지겠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문제가 많은 듯한 여인들이지만 이들에게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은 모두 다 결정적일 때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마지막 16절의 마리아에게서 결론을 맺습니다. 처녀로서 감당할 수 없었던 천사의 수태 고지를 그녀는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연약한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충분히 일하심을 믿으십시오. 우리 스스로 보잘 것 없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물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쇠붙이도 나무와 함께 묶여 있으면 물에 뜨는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은 주님의 강함에 붙어 있을 때 주님의 힘으로 우리의 인생은 새 인생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알려지지 않는 이름들은 12절부터 나오는 바벨론 포로 이후의 족보들입니다. 이 시기를 신구약 중간기, 혹은 신구약 암흑기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고 난 뒤에 신약성경에 세례 요한이 등장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기록되어 있는 족보는 이 기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어느 날 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한 세대 한 세례를 이어가다가 요셉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빌딩을 지을 때 지상으로 올라가는 건물만큼이나 땅 밑의 기초 작업의 공사기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눈앞에 가시적인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지구는 지금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다시 새 날이 시작됩니다. 소리 없이 하루에 한 바퀴를 돌던 그 지구가 그렇게 365일을 지나면 태양을 한 바퀴 또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돌리시는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지만 지나고 나면 다 갈려서 가루가 되어 있다.”
  시간과 세월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의 인생을 돌리시면서 튀어나오고 모난 것들을 전부 다 갈아서 고운 가루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주후 2013-02-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장산교회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