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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23 주일설교요약(목장교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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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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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리아처럼
성경> 누가복음1:26-38 찬송> 120장
  누가복음 1장에 말이 안 되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할머니가 임신하는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처녀가 임신하는 사건입니다. 성탄절은 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부터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짜 성탄절이 됩니다.
  누가는 그의 편지 시작에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말합니다.(눅1:3)
누가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생애에 대하여 기록하고자 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자신은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직업이 의사인 누가가 영물인 천사 이야기, 특히 가임기가 이미 넘긴 여자가 아기를 갖게 되는 사실, 더 나아가 처녀가 아기를 갖게 된다는 비의학적 사실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의학이라는 과학과 믿음이라는 영적인 세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영역을 모두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 말도 되지 않는 이 사건을 증언을 들을 그대로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믿음은 결단이라고 했습니다. 다 이해가 되어서가 아니고, 다 믿어져서도 아닌, 믿어야 할 현실 앞에 믿기로 작정하는 결단입니다. 다 믿어져서가 아니라 내 속에 어느 정도의 믿음이 들어오면 그 믿음으로 믿기로 작정하는 결단입니다. 여러분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그 믿음으로 믿기로 결단하십시오. 그 작은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사는 처녀 마리아(26-27)
  마리아가 사는 동네를 기록하였습니다. 그곳은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마리아의 상황을 말하는데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입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를 아십니까? 후에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게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이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그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말합니다. 그 당시에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강원도 어느 두메산골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 촌구석에서 특별한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했던 무명의 시골 처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처녀는 지금 약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유대인의 ‘약혼’은 같이 살지 않는다 뿐이지 법적으로는 부부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처녀는 조신하게 행동하다가 곧 혼인식을 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이 처녀에게 가브리엘 천사는 찾아가서 알린 소식이 우리가 아는 성탄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 처녀는 우리가 아는 ‘마리아’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그 사람을 당시의 세계적 도시였던 로마나 이스라엘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이 아닌, 이름 없는 시골에 살고 있던 마리아를 택하신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00년 전 ‘나사렛’이라는 지명에 우리가 사는 곳의 지명을 넣어보십시오. ‘반여동’‘재송동’이라는 지명을 넣어보십시오. 주거환경도 안 좋고, 학군도 안 좋고,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모이기보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할 때 떠나버리는 곳. 이곳에도 소망은 있습니다.
조금 못 배웠다고 기죽지 마십시오. 시골 출신이라고 위축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중요한 것은 사람도 아니고 장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느냐에 있습니다.(28, 30)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한 나사렛 동네라도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자랐다는 것도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사는 마리아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은혜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후에 나사렛은 이전의 나사렛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름 없이 살다가 죽으면 되는 촌 처녀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으면 이전의 여러분이 아닙니다. 우리교회가 은혜를 입은 교회가 되면 전혀 다른 교회가 되는 것을 믿으십시오.
수요기도회 때 지역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가난의 영, 술취함의 영, 무당 점쟁이의 영이 떠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군사들이 모이면 강력한 힘이 됩니다. 기도의 영적 군사도 참여해 주십시오.
●은혜를 받은 자 = 말씀을 붙드는 자.
  그런데 여러분, 마리아를 은혜 입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은혜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메시지입니다. 당시의 율법에 의하면 처녀가 임신을 하면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꺼내놓고 이게 너에게 은혜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짓을 말씀하지 않으시니까 그것이 은혜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은혜로 드러나게 하는 일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다가온 은혜를 내가 걷어 차버릴 수도 있고 은혜로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당장 내 앞의 괴로움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누구의 말씀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맞으면 ‘아멘’하십시오. 어떻게 감당할지 그것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아멘’하십시오. 마리아가 우리가 아는 마리아가 된 것은 ‘아멘’에 있었습니다. 어디에 아멘이 나옵니까?
마지막 38절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이것이 ‘아멘’입니다.
  물론 이해도 되지 않고 믿기 싫은 상황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이런 저런 대화가 오고갑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기는 여전합니다. 그때 최종적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때 마리아는 ‘아멘’하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자, 은혜를 입은 자로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마리아는 무명의 시골처녀로 마칠 수도 있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어제 조선일보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몽골선교사로 갔던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의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그분의 말 중에 "신앙은 번지점프와 같다"고도 했습니다.
“누구나 순간순간 갈림길 앞에 섭니다. 용기가 없어서 주저하고, 앞에 뭐가 있는지 불확실해 움직이지 못하지요. 어린아이처럼 앞뒤 재지 않고, 겁 없이, 나를 놓아버려야 합니다. 그 뒤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믿음은 결단입니다. 결단으로 인생 중에 가장 위대한 일을 한 여인이 된 마리아처럼 새로운 믿음의 결단으로 주님의 선하신 일에 쓰임 받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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