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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03주일설교요약(목장교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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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2-06-06

본문

제목> 지속적으로 쓰임을 받는 사역자가 되려면
성경> 사6:1-13(1-9)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때 어떤 사람을 지속적으로 쓰실까요? 그러면 성경에도 일회성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서를 16권 중에 대부부의 선지자들이 한 때만 쓰임 받고 성경상에서도 잠간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1:1을 통해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 왕 웃시야와 요담, 아하스와 아하시야. 4명의 왕을 거치면서 사역하였습니다. 40-50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이사야, 그는 어떻게 50년 동안 지치지 않고 사역할 수 있었는가? 본문에서 그 답을 얻습니다.
단 한 번 의미 있게 쓰임을 받아도 좋겠지만 한 번 쓰임 받고 잊혀지는 사람이 아닌 지속적으로 쓰임을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1.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사 6:1-4)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웃시야는 다윗 이후에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블레셋을 쳐부수고, 홍해까지 영토를 넓혔고, 그의 치세기간 중에 유다는 부강했고 부요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를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앗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도 남 유다는 위축되지 않습니다. 웃시야 왕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도 웃시야 왕을 그렇게 신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대하26:22에 이사야는 웃시야의 시종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웃시야에 대한 그의 흠모했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웃시야 왕이 죽자 이사야는 나라의 보좌가 비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보좌를 이사야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보좌는 비어있지 않았습니다. 웃시야 왕보다 더 강하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 앉아서 통치하고 계심을 본 것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역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자신을 봐서도 안 된다. 나의 재주, 재능을 의지해서도 안 된다. 사람을 믿지 맙시다. 남편도 아내도 믿지 맙시다. 그럴수록 상처 받을 일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은 이해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
 
목장의 멤버가 좋다고 목장이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 목녀 목원 모두가 하나님의 보좌를 볼 수 없다고 곧 목장의 본질은 사라지고 힘들게 될 것입니다. 목장에는 성령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2.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사 6:1) -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라는 말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시기에 신성한 성전이 하나님의 옷자락 끝도 다 담지 못하는 곳이냐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 6:2) - 스랍들이 6개의 날개를 가지고서 두 날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까봐서 가리었고, 또 다른 두 날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서 발을 가리고 있고 두 날개로만 날고 있더라는 것.
 
(사 6:3) -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히브리어의 3번 반복은 최상급을 말함.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압도되어 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하나님의 거룩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함께 동역하자고 하시는 분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역을 하다가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인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 분을 바라보지 못하니까 사역하다가 마음이 상하고, 지치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만큼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역자에게는 예배가 중요하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위대하심, 광대하심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자는 사역 때문에 예배를 놓칩니다. 예배에 성공하지 않는 사역자는 사역에도 성공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주일예배(주일목장연합예배)도 더욱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3. 용서에 대한 감격을 잊지 말자.(사 6:5-8)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 난 뒤에 이사야가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의 죄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의 긍휼의 죄사함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사야의 사역에 대한 헌신이 이어집니다. 그는 “나를 보내소서 내가 가겠습니다.”(8)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용서에 대한 감격이 있을 때 지속적인 쓰임을 받는 사역자가 된다. 특히, 사죄의 용서!
이사야는 바로 그 사건 후부터 4-50년을 변함없는 사역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용서의 감격을 잊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용서의 삶을 먼저 살아야 합니다.
마6:12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용서의 감격이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사역을 많이 할수록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기회는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마다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용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한 번만 더 용서하자.’라는 의지적인 결단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용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옵니다. 더 이상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힘들거나 지치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날이 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더 감격적으로 알게 되고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이 인내하시며 용서했는지도 알게 된다.
 
4. 사역의 중심에 나 자신을 두지 않는다.(사 6:9-13)
본문의 말씀은 사역의 결과가 없더라도 끝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히11:13에는 믿음의 사람들의 사역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당장 그것의 성취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결국은 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원하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재미. 성취감, 자기만족감으로 사역하면 안 됩니다. 즉 사역의 중심에 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있는가? 내가 있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말씀에 순종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나의 사역의 중심에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내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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