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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27주일설교요약(목장교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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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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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족하는 삶은 어디에서 옵니까?
성경. 빌4:11-13
찬송>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이 빌립보서에 얼마나 많은 기쁨이라는 단어가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편지가 바울의 일생 중에 가장 평안할 때 이 편지를 썼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이 로마의 감옥입니다.(1:13) 당시의 로마의 황제는 그 변덕이 심한 네로 황제였습니다. 고의로 로마에 화제를 내고 그 범인을 기독교인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바울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은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과 상황에도 그는 평안을 말하고 있고, 기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자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11b.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오늘 우리는 이 바울을 통해서 자족하는 삶이 어디에서 오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자족함은 환경 개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합니다. 배부름에 처할 줄도 알고 배고픔에 처할 줄도 안다고 합니다. 그것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환경을 개선하기 전에 환경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익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방법을 소극적인 자세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비관적인 자세라고까지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훨씬 더 긍정적인 자세이며 주어진 환경에 대해 정면으로 대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궁핍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풍부해져도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궁핍할 때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풍성해졌을 때 자신의 풍성함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고해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했다고 세상 다 끝난 것처럼 살 것이 아니라 ‘인생은 본래 이런 거야!’ 하면서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칼 융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신병의 원인은 인생을 살면서 마땅히 겪어야 하는 고통을 필요 이상으로 회피하려 하면서 생기게 된다.”
바울은 이미 우리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다고 말하고, 정 감당하기 힘들 때는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신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0:13)
환경적인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 오더라도 이런 믿음 안에서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자족함은 시작됩니다.
 
2. 자족은 자기 수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생의 목표에서 옵니다.
최근에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뉴에이지 사상’이라고 합니다. 이 사상을 단순화 시켜서 말하면 우주에는 기가 흐르는데 이것을 나와 잘 결합하면 새로운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힘과 결합하기 위해 마인드 컨드롤, 요가, 단학 등을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때 평안을 얻고,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새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수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11절)
‘자족하는 법’이란 말(원어: 오타르테스)은 당시의 철학자들이 수양하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 당시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방법은 ‘금욕’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진정한 자족은 자기 수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생의 목표를 가지는 것에서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비천해도 풍부해도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은 진정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에 주님이 필요한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한 말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입니다.
 
빌1:15-18에서 바울의 자족함을 볼 수 있는데, 그는 누가 자신을 음해하거나 시기를 해도 자신이 가진 궁극적인 복음전파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우리는 자족하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3. 우리는 이 빌립보서 안에서 바울이 터득한 자족함의 원리를 찾아봅시다.
바울은 이 비결(원리)를 11, 12절에서 그는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터득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원리1. 불평이나 시비를 하지 말라. - (빌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한 원인이 바로 불평하는 습관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불평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불평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님이 오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빌2:13) 그런데 원망과 시비, 불평이 생기면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원리2. 염려하는 습관을 버려라. -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심리학자들이 염려를 습관처럼 하는 사람을 고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일주일 후에 염려하십시오.”
염려를 수첩에 적어놓고, 일주일 어디를 다녀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의 다 해결되어 있을 거라는 겁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꾸고, 염려대신에 기도하고 감사하라!
 
원리3. 비교하지 마라. -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면 열등의식이 생겨 비참해집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면 교만의식으로 비참해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니까요.
특히 사역하면서 비교하지 마십시오. 목자들은 다른 목자, 다른 목장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로 우리의 남길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말한 것은 “네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으니, 두 달란트를 더 남겼으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아닙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입니다.
주님에게는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나 모두 적은 것입니다. 그저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위해 부르시기 전에 충성(신실)을 위해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원리4.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과거에 대한 좋은 기억이든지 나쁜 기억이든지 모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좋은 기억에 집착하면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 불행해지는 것이고, 나쁜 기억에 집착하면 내 자신에 대한 질책에 불행해집니다. 절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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