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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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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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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엔학고레의 하나님

성경> 사사기 15:9-20

찬송> 15, 254,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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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사사로 활동하면서 일어난 사건 속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라는 나라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못 살겠다고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운 사람이 삼손입니다.

나실인으로 자랐지만 청년이 된 삼손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의 딤나의 한 여인과 결혼합니다. 결혼 연회에서 그는 나실인이 먹어서는 안되는 술을 마십니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사자를 만나 찢어죽이고는 이튿날 그 사자의 시체 속에 형성된 벌집을 발견하고 꿀을 먹음으로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되는 나실인의 법도 어깁니다.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한 후에 블레셋 사람들과의 시비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 시비 과정에서 블레셋 사람이 삼손에게 복수를 하면 그 이후 삼손이 자신의 괴력으로 블레셋 사람에게 복수하는 복수의 연속이 이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죽인 후에 급히 유다에 내려와 숨은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1. 안주하고 있는 죄악의 현실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일로 이스라엘과 한 판 전쟁을 할 태세로 유다의 레히라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겁을 먹고 삼천 명의 사람들이 삼손을 찾아 항의합니다. 11.

너는 블레셋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이렇게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서 압제받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태도를 보게 됩니다. 블레셋이 자신들을 압제하는 것이 당연한 듯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압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의지가 없습니다.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고통은 체념과 함께 익숙해지면 편안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마귀에게 눌려 삽니다. 이것도 익숙하면 환영할 것은 아니지만 별로 불편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사람이 점점 죽는 것이지요. 사탄이 이렇게 우리를 만듭니다. 은혜를 사모하지 않게 만듭니다. 말씀 없이도 그냥 살게 만듭니다. 기도 없이도 살아보면 살아집니다. 사건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떻게 세월 지나면서 해결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굳이 별스럽게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교회가 괜히 큰일을 만드는 겁니다. 하기는 싫고 눈치는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크게 부담스러우면 교회를 떠납니다.

야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광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야성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우리교회가 가정교회하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가정교회하면 여러분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이 편안함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오히려 싸움에서 옵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할 때 맛보는 기쁨입니다.

가정교회를 하면 지금보다 더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 싫으면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의 목장에서 승전보가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기지 못했던 싸움에서 이기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불신 남편이 돌아오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친척이, 이웃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갖가지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은사(은혜)를 자신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삼손을 새 밧줄을 두 겹으로 둘러 결박해서 레히에 진치고 있는 블레셋에 넘깁니다. 그때 삼손은 그의 몸에 묶인 밧줄을 불탄 삼과 같이 끊어버리고 주위에 있는 나귀 새 턱뼈 하나를 집어서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승리에 도취된 듯 이렇게 외칩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16.)

말을 마치고는 천 명을 죽었던 그 나귀 턱뼈를 내 던져버리고 그곳 이름을 라맛 레히라고 부릅니다. ‘라맛 레히의 뜻은 턱뼈의 산(언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삼손은 하나님께 죽겠다는 말을 합니다. 조금 전에는 승리의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죽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마치 자신이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14절에서 삼손의 힘의 근원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시매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에서 그는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제까지 삼손이 보여준 사역의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극히 개인적인 일에다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잘못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우리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것 내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도 별 탈이 없다고 안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삼손도 아직까진 별 탈이 없습니다. 곧 목이 말라서 죽을 지경이 되긴 하는데 그때에도 살아납니다. 그런데 말이죠, 삼손이 그렇다고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것 같지만 실상은 점점 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16장으로 들어가면 삼손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성공 이력에 복음이, 교회가 있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라맛 레히로 만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3. ‘엔학고레의 하나님 -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였던 천하장사 삼손이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았습니다. 싸울 때는 몰랐는데 싸움이 끝나고 한 숨을 돌리자 바로 탈진해 버린 것입니다. 이때 삼손은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18)

이 때 삼손은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처절한 고통의 문제를 호소한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절박한 가운데 드린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호소를 들으셨습니다. 레히에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게 했습니다. 목말라 죽겠다고 하는 삼손에게 물을 넉넉히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마시는 삼손은 정신이 회복되고 소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했습니다. ‘엔 학고레라는 말은 부르짖은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부르짖음으로서 생명을 얻게 된 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엔학고레입니다.

환란 날에 삼손처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엔학고레의 샘을 여러분 앞에 터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 샘의 물을 마시고 다시 힘을 얻을 것입니다. 여호와 신의 권능으로 능력 있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엔학고레의 물로 삼손의 혼미했던 정신이 다시 회복되었듯이 여러분들에게도 회복의 은총이 임하실 것입니다.

 

레히라는 장소는 삼손에게 처음에는 라맛 레히라는 자만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엔학고레로 변했습니다. 아무리 성공을 했다고 해도 위로부터 공굽되는 은혜의 샘이 없는 사람은 곧 바로 넘어집니다.

부르짖어 이 샘을 항상 소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자신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부분은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위로 축복 격려와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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