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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주 / 바울의 역설의 감사(고후 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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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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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도 대 풍년입니다. 풍년이 계속 되다 보니 풍년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삼천리 반도에 남쪽 일천 오백리를 선을 그은 듯이 이 반쪽만 풍년인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주야로 기도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를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우리 조국교회에 주신 사명을 잃어버리면 주신 축복을 거두어 가시는 것도 일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된 나라 이 조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물질적으로 받아 누리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특별한 자들입니다. 그것을 ‘역설의 감사’라고 합니다. 오늘 바울의 편지를 보면 역설의 극치입니다. “…하는 자 같으나 …이고”하는 역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 역설의 감사란 일반적으로 감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역시 바울의 이 역설적 감사를 우리의 감사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감사에 어떤 역설적인 감사가 있는 것입니까?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요?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역에는 유난히 대적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적극적인 복음전파 성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고히 바울을 비난하고 근거 없는 말로 바울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8-9)라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한 마디로 이 말은 억울한 말을 들어도, 누가 인정을 해 주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다 아시는 걸…’하는 태도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말은 너무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잠이 오지 않고 화병이 될 정도로 분한 말이 있습니다. “나를 무시해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복음을 전할 때,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귀에는 복음이 미련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속이는 자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자입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는 알아주는 이가 없는 무명인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가장 주목하는 유명인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죽을) 고생까지도 감사합니다.

왜요? 생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9)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는 이고니온이라는 곳에서는 실제로 대적자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여 성 밖으로 내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행14:19-20) 고린도후서 11:23-27을 읽어보세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았던 바울의 요약적 간증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줄 알았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는 것과 죽음의 목적이 동일했기 때문입니다. 즉,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5:8에서 그는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했습니다. 빌1:21에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나의 사명이 다 하면 하나님이 오라 하실 것이며, 그것은 나의 소원이다.’ 이것이 바울의 사역의 기본자세였습니다. 이런 그의 삶의 태도가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고백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자에게 나타나는 뚜렷한 현상이 그 다음에 나오는 역설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10)

분명히 근심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기뻐합니다. 왜요? ‘죽으면 천국인데 뭐…’

울며 통곡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멘’합니다. 왜요? ‘죽으면 천국인데 뭐…’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생명이 하늘 생명으로 이미 인정된 사실 속에 역설의 감사를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없어도 감사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10b)

가난한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다음 역설에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10c)

그러면 여기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롬11:36에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사실 가진 것이 많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예수라는 보배를 얻고 나니 이전에 자신이 보배라고 생각했던 것은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언제든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 있으면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우리는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할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선언을 보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은과 금이 앉은뱅이를 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살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역설의 감사가 있는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있는 절대적인 평안과 삶의 풍성함을 누리기시 바랍니다. - 아 멘 -

 

☞1)나는 감사하면 살고 있습니까? 나의 감사는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나의 감사 수준은 세상사람 수준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나도 바울처럼 역설의 감사가 있습니까?

2)홀리데이축제를 위해 초청대상자를 점검하고 그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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