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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주 / 당신의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눅2: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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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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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의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 눅2:40-52
찬송> 563, 564

  첫 주일은 어린이주일이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지만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시127:3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기업은 유산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우리에게 특별한 유산으로 주십니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이 자식으로 농사를 해서 하나님 앞에 결산해야 할 자들입니다.

오늘은 자녀들을 양육할 때 우리가 깊이 다시 새겨야할 자녀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 모범을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던 유월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유대인 남자 아이는 12살이 되면 이제까지 배워왔던 율법을 실제적으로 실행하는 시기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열두 살이 된 아들 예수를 유월절 절기를 바로 지키는 아들로서 교육하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유대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습니다.(42)

이들은 유월절 기간을 충실히 다 지키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43) 그런데 이때 귀향길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생깁니다. 당연히 함께 고향으로 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 길을 간 후에야 이 사실은 안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적지 않게 당황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예루살렘 성전까지 찾아가게 된 길이 사흘 길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아이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이가 의연하게 성전의 율법 교사들과 듣고 묻고 말하면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생각과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함께 가고 있는 줄 알았지만 그 길에 아이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은 부모의 속을 썩이는 문제아입니까? 아닙니다. 누가가 다른 복음서에 없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오히려 예수님이 극히 정상적으로 자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40절은 예수님의 12살 되기 이전의 자람을 요약한 기록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52절은 12살 이후 예수님의 자람을 요약한 기록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는 예수님이 극히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12살 때의 사건은 아이의 발달과정에 변화가 정상적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변화입니까? 아이들은 부모와 항상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가 되면 그들은 자신의 길을 갑니다.

예수님도 열두 살이 되는 해에 그들의 부모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였습니다. 사건의 옳고 그름을 따지면 아이 예수에게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걱정을 할 것이 분명하니 말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48절.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성도 여러분, 때로 아이들은 부모가 생각한 곳과 전혀 다른 곳에 있을 때 당황하지 맙시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모를 떠나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잘 떠날 수 있도록 해 줘야 합니다. 떠날 때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격려하고 축복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더 대범함으로 자식들의 길을 볼 수 있는 준비된 부모, 어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래도 그 아이가 성전에 있으면 됩니다.(46)

결국 예수님은 성전으로 되돌아가서야 찾았습니다. 아이를 잃은 것을 하룻길 만에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찾는 일에 사흘이 걸렸습니다. 이는 성전에 있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 삼 일 길에 요셉과 마리아의 속은 타들어갔을 것이며 마음은 무너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마지막 소망을 둘 곳은 성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성전에 아이가 있었습니다. 놀람과 순간적인 분노, 그리고 안도감이 교차하는 말이 바로 48절 말씀입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러나 여러분, 아이들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마지막 그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성전이라면 안심입니다. 믿습니까? 아이들도 세상에서 감당하기 힘든 큰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라도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장소가 성전이요 기도의 제단이라고 한다면 그 아이는 복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런 아이들이 되기를 소원해야 하고 그렇게 교육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면 외적으로 다 갖춘 것 같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잃는 자가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그 무엇보다 더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잘 키우기를 원하지만 하나님보다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처소인 성전,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를 중심한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 그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우리의 최종의 목표는 예수님이 고백한 것처럼 그 아이가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49절.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아이 스스로가 그 성전의 자리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걱정은 없습니다.(49)

3. 그러므로 이젠 새로운 영적인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봅시다.(51하)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마리아의 태도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걱정하여 찾아온 부모의 질책에 49절의 예수님의 대답은 부모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부모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나와 있습니다.(50)

하지만 51절에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51절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즉 자신의 아들에게 직접 하실 일이 있을 것임을 믿는 태도입니다. 자신은 이해를 잘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 역사하실 것을 믿고 소원하는 태도입니다.

단지 육신적인 시선으로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아이를 보는 것입니다.

사실 앞서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했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나를 육신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48절에 마리아가 예수에게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말했는데 49절에 예수님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니까”하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을 말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말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나의 아들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이들이 자라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아이 때문에 하나님의 아이, 나의 아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무시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나의 아들로만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우리는 어떻게 자식을 양육했는지 서로 말해 봅시다. 오늘 말씀에 내가 가장 ‘아멘’할 수 있었던(혹은 해야 했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서로 행동의 결단을 위해 기도하고 자녀들을 위해 축복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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