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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넷째주 / '나실인'으로 새로운 서원(민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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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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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나실인’으로 새로운 서원

성경> 민6:1-12

찬송> 324, 302

‘나실인’이라는 뜻은 ‘구별된 자’를 가리킵니다. 나실인은 성별에 관계없이 일정기간 또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섬기기로 서원하여 자신을 세상에서 구별하는 평신도입니다.(레위기27:2) 이들은 자신들이 나실인 임을 나타내는 몇 가지의 의무조항들을 지켜야 했는데 이런 것들을 이행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특별한 기간을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이 나실인으로서의 규례는 구약의 율법이기에 오늘날에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완성되고 난 뒤에도 이 나실인으로서 서약을 하고 나실인의 규례를 지켰습니다. 행18:18에 보면 바울이 선교여행 중에 겐그레아라는 곳에서 ‘일찍이 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머리를 깎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선교 여행 중에 특별한 서원의 기간을 결단하고 이제 다 지냈고 그 기간을 끝냈다는 말입니다. 그가 복음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인가? 아닙니다. 바울만큼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순수 복음을 역설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율법의 유익을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나실인의 규례를 지킴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실인의 규례가 무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규례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결단을 지키고 유지하는 좋은 방편이 되었기에 그는 규례를 지킨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말씀 속에서 나실인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이 시대의 나실인의 정신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새기기를 원합니다.

1.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 말라.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자원하는 것입니다. (2)

물론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과 같이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 의해 나실인이 되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서원을 하는 것입니까? 시편15:4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담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자원하게 됩니까?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은 자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헌신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나실인의 서약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토대가 된 헌신의 표현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나실인으로서의 서약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이렇게 서약을 하고 나실인으로서의 기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실인의 규례를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긴장을 합니다. 나실인으로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실인은 특별한 사람, 자원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 안심합니다. 그리고는 “그래, 나는 특별한 사람은 될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이란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헌신하고 싶어 했던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나실인의 규례를 정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오고 오는 세대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특별히 사랑하여 헌신할 사람들을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하여 특별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의 결단과 그 은혜를 체험하시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특별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헌신 하는 것은(깊은 은혜의 자라) 세상에서는 좀 더 불편해지기로 작정하는 것(3-8)

3-8절에 나타난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보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헌신하면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①포도나무에서 나온 소산이나 그와 유사한 술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3,4) 포도주는 알콜 성분이 높아지면 음료수를 넘어 술이 됩니다. 술과 음료의 경계는 참 애매합니다. 그러므로 쉽게 술에 취할 수 있습니다. 술은 인간의 바른 의지를 깨뜨리고 반면에 잘못된 의지에 대해서는 담대한 용기를 갖게 합니다. ②머리를 깎을 수 없었습니다.(5)

삼손은 길게 자란 머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긴 머리카락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③시체를 접해서는 안 되었습니다.(6,7) 죽음은 범죄의 결과입니다. 나실인은 자신이 죄와 구별되었다는 것을 시체를 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내었습니다.

나실인은 이와 같은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증거를 나타내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불편해지기로 작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란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예수를 잘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더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 깊은 헌신을 의미합니다. 주 안에 있는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불편해지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절제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을 다 누리고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헌신이란 더 어려운 일이 됩니다. 더 깊은 은혜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누릴 것을 너무 많이 보여주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안목의 정욕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릴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고 필요 없는 것들로 무거워진 나의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3. 다시 도전하는 용기!

가끔 보면, 더 이상 깊은 헌신과 은혜의 결단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두 종류 중의 한 종류입니다. 첫 번째는 깊은 곳에 빠지면 오히려 손해 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은혜의 진정한 맛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전에 헌신과 결단을 한 적이 있었지만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런 사람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9-12)

12절에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적이 있다면 낙심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실패는 있을 수 있어도 낙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잠24:16에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실패는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낙심은 죄입니다. 왜냐? 우리는 이미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를 보장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헌신의 작정을 하고서는 낙심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실인의 서약을 하고서 실패했더라도 정리하고 난 뒤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만큼 서원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서원을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해 보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가졌던 그 아름다운 각오와 결단들.

이제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감당도 못할 것을 괜히 시작해가지고” “그래 그때 내가 객기를 부린거야!”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가봐”

그러나 여러분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너무나 귀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 결단했던 그 마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단, 그 마음을 접어버린 것을 더 안타까워하십니다.

좀 더 큰 은혜, 더 깊은 은혜를 위해서 다시 나실인처럼 새 서원(결단)으로 도전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나의 신앙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합니까? 더 큰 은혜의 자리와 체험을 위해 나실인처럼 새로운 서원(결단)을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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