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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셋째주 / 이름 없는 한 어린 여종(왕하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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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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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이름 없는 한 어린 여종
* 성경> 왕하5:1-7
* 찬송> 538, 449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가치를 신분의 고하(高下)나 부(富)의 유무(有無)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진 자가 되었고 또한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줄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눠져 있던 시대에 살았던 한 소녀의 이야기를 통하여 교훈을 받으려 합니다. 이 소녀는 집에서 부모 밑에서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잘 양육된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이 소녀는 전쟁 중에 어린 몸으로 포로로 잡혀가 그 나라의 군대장관의 집에서 여주인의 몸종이 된 불행하기 짝이 없는 한 소녀입니다. 그래서 이 소녀의 이름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소녀에게서 무슨 희망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 소녀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소녀를 통하여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려 하는 것입니까?

이 소녀가 포로로 잡혀 가서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집은 아람 나라의 국왕 다음으로 최고의 실력자 군대장관 나아만 장군의 집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세상적으로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권세가 있습니다. 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그에게 크게 즐거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절 하.
그는 큰 용사나 나병환자더라

그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서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권력의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러나 빛나는 갑옷 밑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그 자신의 가장 큰 고통이 있었으니 갑옷 아래 감춰진 그의 몸은 나병으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무슨 즐거움이 있었겠습니까? 처자식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살아도 사는 것 같이 않은 이 나아만의 인생에 복음(가장 좋은 소식)이 들여왔습니다. 그 복음은 전혀 생각지 않았던 곳에서 들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에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에 포로를 잡아왔던 자기 집에 있는, 자신의 아내를 섬기는 몸종에서 였습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

오늘 성경을 보면, 아람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인데 다른 어떤 이야기도 없고 오직 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어린 소녀 아이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는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잡아 왔다고 하는데, 아람의 군대가 이 어린 소녀 하나를 잡기 위해 그런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어린 소녀는 전쟁 중에 우연히 잡게 되었을 것이고, 그 소녀 아이는 군대의 총지휘관이었던 나아만 장군의 아내의 몸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어린 소녀 하나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어린 소녀가 자신의 집 주인에게 복음을 던져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있습니까? 여기에는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생각해 보는 우리의 상상이 조금 필요합니다.

이 어린 소녀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이 집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자기 집 주인 나아만 장군도 엘리사 선지자에게만 찾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회가 왔습니다. 이렇게 그의 여 주인에게 말합니다.

3절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엘리사를 찾아가면 구원받는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그 당시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자이고, 선지자를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소녀의 말이 복음인지 아닌지는 예수님의 언급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 예수님은 구원의 은혜 받을 자만이 은혜를 받고 그 은혜는 이방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말씀을 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눅4:25-27)

나아만이 병에서 놓임을 얻은 것은 단지 병에서 놓임을 얻는 것 이상으로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병 고침을 받은 후에 엘리사에게 찾아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5:17)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왜 이 이름 없는 소녀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어떤 지위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2. 복음을 복음 되게 하라.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이렇게 높은 지체의 사람이 한낱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였나 하는 것입니다. 여주인은 어떻게 여종의 말을 그대로 믿고 남편에게 말했을까요? 4절에는 나아만이 이 내용을 그대로 그의 왕에게도 말합니다.

이 여종에 대한 신뢰감입니다. 즉 이 아이의 말은 믿을 만하다는 신뢰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종의 말은 무시를 당하기 쉽지 신뢰를 주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주인이 이 여종의 말을 신뢰했다는 것은 평소에 이 여종의 삶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여종은 주어진 일에는 충성스럽게 일합니다. 또한 하는 모든 일처리에서 이 아이의 지혜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하는 마음의 중심은 주인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주인은 이 여종의 이 모든 생활은 이 아이가 믿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에는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를 팔려간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집의 가정 총무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디발은 요셉의 성실과 지혜를 보았고 나중에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본 것입니다.(창39:3)

우리는 여기에서 또 섬기는 자에게 필요한 3대 덕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충성과 지혜와 진실입니다. 결국 우리 입술의 말은 우리의 삶이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복음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통하여 더욱 온전히 전파되는 것입니다.

3. 믿음 없는 이스라엘의 왕이기 보다는 믿음 있는 이름 없는 여종이기를!

나아만은 왕의 허락을 받아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을 찾아 가서 자신이 찾아온 경위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었던 여호람은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줄로 생각하여 자신의 옷을 찢어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7)

종이었지만 믿음이 가진 소녀에게는 엘리사만 만나면 쉽게 해결된다고 생각됐던 문제가, 왕이면서도 믿음이 없었던 여호람에게는 옷을 찢으며 낙심하고 괴로워할 만큼 큰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7절)

왕의 말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7)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능력은 현재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종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자신의 삶에서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세는 있지만 믿음이 없어 불안에 가득 찬 왕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이름 없는 한 여종일지라도 내가 선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고 전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나의 지난 한 주간의 삶은 여호람 왕과 이름 없는 여종의 삶을 비교, 적용시켜볼 때 어느 쪽에 더 가깝습니까? 서로 말해보고 모두의 믿음과 능력의 삶의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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