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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둘째주 / 그런데 너는 누구냐?(행19: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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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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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런데 너는 누구냐
성경> 사도행전 19:8-20
찬송> 370, 312

사도행전 19장은 에베소에서의 사도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에베소는 그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마술의 중심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마술하면 사람의 환각이나 재빠른 손놀림을 통해 눈속임수를 쓰는 것을 말하지만, 그 당시의 마술은 그런 것하고는 달랐습니다. 물론 속임수를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제로 악귀의 힘을 주문이나 마법을 통하여 이끌어 냄으로서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는 일들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누가 병을 고쳤다더라. 어떤 놀라운 일을 보았다더라’하면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따라다니고 그러다가 신앙의 기본까지 잃어버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 11절을 보면 바울의 에베소 사역 기간 중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통해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십니다. 심지어는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자에게 얹기만 해도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가 떠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놀라운 이적을 보았던 그 당시 술사들이 어설프게 바울의 흉내를 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어설프게 흉내를 냈던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게 악귀가 한 마디 하는데 15절에“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합니다. 너희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모양만 흉내 내서 어떻게 한번 해보려다 바울과도 하나님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임이 들통이 난 것입니다.

스게와 일곱형제와 같은 일들은 왜 일어나는 겁니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먼저는 그들과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악귀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바울도 알고 하나님도 아는데 너희들은 누구냐?” 쉽게 말해서 “바울과도 하나님과도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들이 상관있는 척 떠벌리면서 까불고 있냐? 하니까 벗은 몸으로 정신없이 도망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으니까 줏대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고 또 이리저리 치이게 되는 겁니다. 악귀의 조롱 섞인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냐?”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4).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다보면, 내가 정말 그런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마귀도 우리의 귀에 “너는 안 돼! 너의 신앙은 가짜잖아! 너 자신이 더 잘 알잖아”라는 식의 조롱 섞인 말들을 던집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정말 그런가 보다 하는 마음이 어느덧 자리 잡게 되어 신앙의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완전히 마귀에게 놀아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상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쳤던 스게와의 일곱형제와 같은 꼴이 되고 맙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신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택하심을 믿으시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신앙의 고백을 분명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시작한 사랑이었더라면, 수도 없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12번도 더 변하는 우리의 마음 따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들쑥날쑥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시작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우리의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셔들임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의 시대적 상황들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계속 폭등하는 국제유가로 인한 경제적 여파, 다행히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조류독감발생으로 인한 파장, 광우병으로 인한 쇠고기 파동은 10만의 촛불집회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그동안 계속되어온 독도 문제로 일본과 우리나라는 미묘한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북한 청진에서는 대학생 수십 명이 성경책과 성경을 주제로 만든 CD를 돌려 보다 발각되어 보위부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것들은 중국내에 있는 북한의 기업 금릉회사 직원들과 나선시 지하교인들이 협력하여 밀가루 포대에 숨겨 북한 내로 들여왔다고 합니다. 이미 주동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주변국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중국에서는 쓰촨성 지진으로, 미얀마는 태풍으로, 티벳은 인권사태로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뉴스 보도를 요약 정리해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련의 상황들과 교회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교회들이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될 기도제목들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으로 우리 교회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그렇지가 못합니다. 저마다의 교회들은 개교회주의를 드높이며 성장을 외치고 있습니다. 성장 그 자체가 목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 장산교회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요즘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추세가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시대라고들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대형교회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대형교회가 어떤 면에서는 큰일들을 앞장서서 추진해 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교회들은 대형교회로 가는 것 자체가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목적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교회가 커야 일을 해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장산교회도 대형교회이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망해야 되는 것은 대형교회가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바라 볼 줄 아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지역사회의 아픔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민족의 아픔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뭐래도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망각하면 더 이상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큰 교회가 되어야 제일이지! 하는 마음이 혹시 있다면, 그 분은 아직도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못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교회의 사명은 누가 뭐래도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 확장과 대형교회를 같은 선상에 놓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적 사명에 충성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그 일들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성장하는 은혜도 있는 것이지, 대형교회가 되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교회가 크지 않아도 얼마든지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귀가 던진 “그런데 너희은 누구냐?”는 질문을 통해서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바라보실 줄 아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흔들림 없는 신뢰함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모른 체 ‘교회인 내’가 감당할
   시대적, 지역적
사명을 방관하고 있지 않은지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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