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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둘째주 / 아버지의 마음(눅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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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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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 아버지의 마음
성경> 눅15:11-32
찬송> 579, 577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면면의 특성을 깊이 생각해보면 아버지적인 요소도 있고 어머니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구약의 성부의 개념은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많습니다. 지극히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꾸짖고 훈계하고 징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를 보면 위로 격려하고 품에 안아 감싸주시는 어머니의 역할이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리의 부모님의 마음으로부터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탕자의 비유라고 말해지기도 하고, 잃은 아들의 비유라고도 말해지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인공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탕자에 대해서 아버지는 어떤 마음을 가졌고 어떻게 대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고 또 그 아버지의 마음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연결되는 것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아버지를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 아버지는 기다립니까? 있어야 할 아버지의 집에 있지 않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둘째가 자기의 유산의 몫을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
생존해 있는 아버지를 두고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큰 불효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 채,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정 그러면 네 뜻대로 해 보라’고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아들은 집을 나갔고 이 아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생각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던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통곡하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18:33)라고 통곡하였습니다.
20절에 행색이 남루하여 알아보기도조차 힘든 이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있어야 할 곳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버지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그러면 고생입니다. 그의 인생은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기다림에 지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이 큰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하나님의 집을 떠나 살면 그것은 하나님의 큰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서 성년의식을 행하시고 난 뒤에 바로 깨달은 것이 자신의 집이 어디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집과 하나님의 집, 모두를 다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먼저, 육신의 집입니다. 그 집에서 그는 그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도우며 목수의 아들로써 섬겼습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을 자신의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왔던 육신의 부모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우리에게 역시 육신의 집과 영혼의 집이 함께 있습니다. 모두 우리가 떠나서는 안 될 아버지 집입니다.

2. 집안의 탕자가 되지 마십시오.
탕자는 꼭 집밖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집안에 있어도 탕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집안에 아버지와 같이 있어도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바른 아버지와의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탕자입니다. 즉 몸은 집에 있지만 그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에서 떠나 있으면 그 사람도 탕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큰 아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심지어는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불편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큰 아들은 동생이 들어왔고 그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있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28-29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아버지의 또 다른 근심거리가 됩니다. 작은 아들이 집에 들어오니 이제 큰 아들이 들어오지 않으려 합니다. 탕자는 꼭 집을 나가야 탕자가 아닙니다. 집 안에 있어도 충분히 탕자가 될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와 목적이 아버지의 재산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진 관심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집안에 있는 탕자는 아닙니까? 우리의 부모님께 우리는 집안에서 탕자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탕자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앞에 우리는 탕자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리의 관심사입니까?

3. 아버지의 것을 누리고 삽시다.
불평하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
주고 또 주고 다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까지 그는 아들로서 살지 못했고 종으로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언제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이미 아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고기 가운데 부성애의 대명사로 알려진 가시고기가 있습니다. 이 가시고기는 암컷이 알을 낳고 가면 알이 부화가 되어 혼자 살 정도가 될 때까지 수컷이 모든 것을 돌봅니다. 하루 24시간 잠도 자지 않고, 대적들을 보호하면서 계속 지느러미로 알이 잘 부화할 수 있도록 물결을 저어줍니다. 그리고 알이 부화될 때쯤에는 가시고기는 기진맥진하여 죽게 됩니다. 그러면 가시고기 치어들은 그 아비의 살을 양식으로 삼아 자랍니다. 죽고 난 뒤에까지 그 시체까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시고기의 사랑에서 먼저, 우리 부모님의 사랑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살리셨고, 우리는 지금도 예수의 영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 희생의 이유는 보상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희생했으니 너희들은 앞으로 나를 위해 살아라’ 이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를 위해 다 해놓았으니 너희는 누리며 살아라’입니다.
기쁘고 즐겁게 받아 누리는 자가 아버지의 기쁨이 됩니다. 줘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만큼 아버지의 안타까움은 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잘 사는 것이다’ 육신의 아버지(어버이)와 하나님 아버지 앞에 효도하는 것 역시 우리가 믿음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 부모님에 대해 지금 우리가 회개하고 고쳐야 할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워하실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를 나눠보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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