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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첫째주 / 어떤 자녀를 원하십니까?(삼상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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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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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떤 자녀를 원하십니까?
성경> 삼상2:12-21
찬송> 568, 199

마7:11에는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을 것을 줄줄 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악한 자라고 할지라도 자식들은 그렇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부모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있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제목 ‘어떤 자녀를 원하십니까?’라는 말은 그 안에는 ‘어떤 부모가 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한나와 그의 남편 엘가나의 아들 사무엘의 모습과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제자장의 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무엘상 1-4장의 기록은 ‘당연히 계승되어야 하는 대제사장 직이 엘리의 가문에서 계승이 되지 못하고 왜 사무엘이 등장하는가?’하는 바로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를 낳게 된 우선적인 이유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 그들 자신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비인 엘리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습니다.
반면 또한 왜 당시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가? 이것 역시 사무엘의 부모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문을 비교 대조해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다음 세대)이 어떤 아이들로 자라기를 원하시는지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아이들이 되게 합시다.(12)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의 제물을 빼돌리는 배행을 저지르고 성소의 여인의 범하는 비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입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2절.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이 구절은 엘리의 아들들이 행실이 나쁜 것과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동일하게 취급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119:9)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는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시119:105)
그러므로 말씀이 없으면 행실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왜 엘리의 아들들에게 말씀이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말씀으로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이 가문이 어떤 가문입니까? 제사장 가문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아들들에게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잠17:25에 “미련한 아들은 아비의 근심이요 어미의 고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심과 고통의 씨를 부모가 뿌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후 엘리는 아들들 질타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삼상2:25b)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대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서지 않았습니다.
잠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없으면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도 방자한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는 일에 열심입니까?
학교 공부에 몸과 마음과 심지어 신앙까지 빼앗겨 버리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 너무 답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잠1:7에‘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잠9:10에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말씀합니다. 지식,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잘 알수록 더욱 명철한 것인데, 우리는 지식과 지혜의 근본을 제쳐두고 세상의 이치와 정보 속에서 지식을 얻고자 합니다. 성도로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2. 바른 예배를 드리는 아이들이 되게 합시다.(17)
엘리의 아들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다는 것입니다.(17)
이들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가지고 오는 제물을 사환을 시켜 가로챘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으로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오직 제물에 대한 탐욕만 가득하였습니다.
엘리는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분명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의 정신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나 봅니다. 이들은 지금 제사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보십시오. 2:11.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은 제사장인 엘리의 아들들이 아니라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제사 드리는 일을 여호와를 섬기는 일로 철저하게 배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엘리의 아들들을 행실을 지적한 17절의 말씀과 사무엘의 행실을 말하고 있는 18절을 통해 대조되고 있습니다. 17-18절. “이 소년들(엘리의 아들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사무엘의 이런 모습은 그의 부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대는 사사시대입니다. 많은 곳에서 제사가 폐지되어 가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도 엘가나와 한나는 매년 여호와의 집에 올라갔다고 되어있고(1:7) 19절에도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여전히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부모의 경건함이 고스란히 그의 아들 사무엘에게 이어진 것입니다.
내가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야 자녀들도 그렇게 합니다. 가끔 이런 논리를 펴면서 예배를 폐하고 주일성수 문제를 합리화시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배는 앞으로 평생 할 것이지만 공부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공부를 못해서 대학에 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말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다면 잠시 예배를 보류해도 좋다고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자녀에 대한 진정한 축복을 원한다면 그 아이의 전생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식들이 어디 5년, 10년 살다가 말 인생입니까? 좋은 대학에 갔다고 그 아이의 인생이 성공한 인생입니까? 이제 시작입니다. 그 아이들의 남은 생애는 하나님이 인도해 주지 않아도 됩니까?
적어도 양보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은 지켜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아이가 되게 하십시다.
사무엘의 자랄 때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여호와 앞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21)
부모 앞에서 자라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해 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여호와 앞에서 자라게 합시다.

오늘날 우리가 자식들에게 전해줘야 하는 것들이 참 많겠지만 무엇보다 신앙의 복된 유산을 남기도록 합시다.서양속담에 ‘자식들은 부모의 앞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뒤를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녀를 원하기 전에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 나의 가정의 자녀의 신앙교육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말해 봅시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다음 구역예배 때 그 실천한 것을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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