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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셋째주 / 저주는 예수님이, 축복은 내가(창2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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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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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저주는 예수님이, 축복은 내가
성경> 창27:1-14
찬송> 272, 251

오늘 말씀은 믿음의 3대 족장 중 두 번째인 이삭이 나이가 많아 죽기 전에 그의 아들을 축복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건입니다. 이삭은 장남인 에서를 불러놓고 죽기 전 마지막 축복을 할 터이니 자신을 위해 사냥을 하여 별미를 만들어 자신을 기쁘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어머니 리브가가 들었습니다. 에서가 사냥을 하러 나간 사이에 리브가는 둘째인 야곱을 불러 말합니다. “아버지가 지금 마지막 축복을 하기 위해 형에게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고 했다. 너는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가서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오너라. 내가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줄 테니 네가 그것을 들고 아버지께 가거라. 그리고는 네가 형 대신 축복을 받으라.”
이 말을 들은 야곱은 장자의 축복은 받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형과 자신은 용모가 다른데 특히 형은 털이 많았지만 자신은 털이 없어 아버지가 손으로 만져보면 거짓이 들통이 다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의 말만 듣고 하라는 대로 하라 합니다. 이에 야곱은 순종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이 가져온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남편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었습니다.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혔습니다. 잡은 그 염소의 털을 가지고 맨살이 드러나는 야곱의 신체부위에 발랐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시키는 대로 했고 결국 장자가 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 사건이 나타내는 비유
이 사건은 내용 구성상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입니다. 그에게 축복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야곱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하지만 축복의 대상이 아니라 받을 수 없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축복받고 살기를 원하지만 이미 범죄하고 타락하여 축복의 대상이 아니라 저주의 대상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형 에서 대신에 야곱에게 아버지의 축복 받을 준비를 하라는 말에 야곱의 반응을 보십시오.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12)
이것이 본래 우리의 상태입니다. 우리의 상태 그대로 하나님께 가면 우리는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다 받을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를 만족시킬 재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만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순결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처음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죄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에게 선언되었던 사망이 이르렀고 사망은 저주로 우리의 현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앞으로 이 저주의 마지막은 영원한 지옥형벌이 될 것입니다.

• 저주를 담당하시는 예수님 - 저주는 내게로 돌려라!
그런데 리브가가 이런 절망적인 아들 야곱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엄청난 말을 합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 돌리리니”(13)
저주를 벗어나야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받아야할 저주를 다른 사람에게로 돌려버린다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어머니 리브가 자신입니다. “너에게 저주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다 받을 것이니 너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리브가는 역할 모델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예수입니다. 우리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신 우리 예수님입니다. 죄 없으신 그 분이 당하신 저주와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그 분밖에 없었습니다. 왜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죄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어머니 리브가 밖에 없습니다. 이삭이 가장 좋아하는 별미를 누가 만들 수 있습니까? 아내만큼 남편의 입맛을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 아무 공로 없는 우리 - 내 말만 따르라!
그러면 야곱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가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일은 그의 말대로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해 준 것을 가지고 그는 그의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말합니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13)
어머니의 말만 따를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해 놓은 것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만족합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입니까? 그의 어머니 리브가를 찾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어머니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나를 도와주세요!”
그러나 에서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아버지를 만족시키려 하였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자립심이 있어 좋은 것입니까? 아버지를 만족시키는 일이 축복과 저주를 판가름할 일일 때는 가장 최고 최상의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어야 합니다.(마13:44-45)
그런 면에서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정말 큰 복이었습니다.
내 것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라고 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련해 놓은 길만 걸어가면 됩니다.

• 마치면서 -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에 대한 진정한 열망이 있습니까?
이삭은 과연 자기에게 축복을 받으러 온 사람이 야곱인 것을 몰랐을까요? 상식 수준에서 생각해 보면 모를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결과가 난 것입니까? 답은 이삭은 속아줬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머니 제안에 아버지를 속이는 일이 된다고  걱정했지만 아버지는 알고도 속아주었습니다. 그러면 왜 속아주었을까요?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질문도 해 봅시다. 어머니 리브가는 왜 장자 에서를 두고 차남이 야곱에게 축복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역시 동일하게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와 이삭이 결국 받아들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쌍둥이가 태어날 때 하나님이 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25:23)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 야곱을 더 사랑하기는 했지만 인간적인 사랑 때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 이삭도 이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축복받기 위해 오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지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동생 야곱이 가진 장자의 축복에 대한 열망입니다. 에서와는 비교되지 않는 장자에 대한 열망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이것을 본 것이며 그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에서가 가졌던 이런 열정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우리는 분명 저주를 끝내고 복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축복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그 십자가를 의지하여 일생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나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야겠다는 열망이 있습니까? 그 복을 받기 위해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고 살 결단과 각오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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