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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넷째주 / 부활신앙으로 사는 사람(롬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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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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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사람
성경> 롬 6:3-4
 찬송> 161, 162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생각은 ‘자살’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실행하는 것에는 정말 큰 결단이 필요한 것을 보면, 죽음 그 자체가 그 어떤 두려움보다 더욱 큰 두려운 것임이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낄까요? 그것은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죽음을 분명한 형벌로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은 벌입니다.
요일4:18에는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 창조 시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죽음이 형벌로 인간에게 내려졌고 한번 죽는 것이 범죄 한 인간에게는 정해진 하나님의 법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오래 살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정해진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 행복한 자나 불행한 자 모두가 죽음의 두려움 앞에 서야합니다.

1. 부활 신앙
그렇지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죽음 후에 새 삶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죽음을 대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죽음에 대해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으면 인생이 바뀝니다.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란 결국 내세관입니다. 내세관은 곧 신앙관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기쁨으로 삼고 순교를 영광으로 여겼던 것이 곧 내세관의 확실성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내세관은 무엇입니까?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기준은 부활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두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그 신앙의 본질을 부활신앙에 두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시작부터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어떻게 아비가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의 목을 자르겠다고 칼을 들이 댈 수 있습니까?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그 답은 히브리서 11장에 있습니다.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럼 그 믿음은 대체 어떤 믿음입니까? 부활믿음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11:19)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 전에 이미 부활신앙에 자기 목숨을 먼저 바친 사람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메시지입니까? 하나님조차도 당시 그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에 놀랐을 것입니다.
창22:12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정 인정하시는 신앙은 부활신앙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으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보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시며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2. 부활은 재창조의 역사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법칙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다른 존재로 환생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죽는다는 것이 결코 비존재가 된다거나 무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28:5-6절을 보면, 천사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일까요? 요한도 예수님의 무덤의 현장을 보고 믿었다고 했습니다.(요20:8)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다음에 완전한 정지 상태에서 3일 동안 무덤에 있었고 주일 아침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옛것의 완전한 죽음에서 이루어지는 재창조 역사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의 부활의 아침을 여러분은 상상해 볼 수 있습니까?
죽은 시체로 무덤 속에 갇혀있던 예수님의 몸에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그의 몸은 온몸을 감쌌던 세마포에서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무덤 속을 나와 버립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이 부활이 우리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오늘 말씀을 봅시다. 롬6:3-4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되었고, 함께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 생명으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의 고난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주님에게 나타난 새 생명은 나의 새 생명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새 생명을 얻은 자의 삶 - 증거
이 새 생명을 얻은 1세기의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자신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말 물불 안 가리고 부활을 증거하며 그 보람으로 살았습니다. 1세기 크리스천인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2)
사도행전 행2: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리라 하니라”고.

부활은 최종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망 앞에서 떨고 있던 인생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소망을 주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적이요 두려움인 사망의 권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망의 권세에 허덕이며 소망없이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전해줘야 합니다. 그들도 눌려 사는 인생에서 새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줘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 이제 그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번 주일부터 ‘08봄 장산예수사랑큰잔치’가 열립니다. 마지막까지 이 부활의 소망을 나눌 사람을 찾고, 전하여 우리는 주님의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합시다.

☞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전히 죽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부활 소망을 나눌 사람은 정해졌습니까? 이번 ‘08봄 장산예수사랑큰잔치’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눠보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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