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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첫째주 / 당신의 마음밭은 어떻습니까? (마13: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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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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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의 마음 밭은 어떻습니까?
성경> 마13:18-23
찬송> 269, 446

무엇이든 제대로 결실을 하려고 하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씨와 밭입니다. 좋은 씨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씨가 좋아도 밭이 좋지 않으면 결실할 수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13장 1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단지 오늘 본문은 이 비유를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다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씨 뿌리는 비유’라 해서 씨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중심 내용은 ‘밭’입니다.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뿌리다보니 네 곳에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 네 장소 중에 씨가 열매를 맺은 곳은 단 한 곳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결실하는 마음 밭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결실하는 밭이 적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보면 결실하는 밭은 네 곳 중에 단 한 곳에 불과합니다. 말씀의 본질적인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심령의 밭을 점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호세아 10:12에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밭을 돌아보며 내가 기경해야 할 밭은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길가와 같은 밭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은 말씀이 역사를 하지 못하는 밭입니다. 길가는 사람이 다니는 곳이지 씨가 자랄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곳은 항상 번잡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의 소식, 소문을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오직 세상의 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속히 세상의 것을 다 비워야 합니다. 토요일까지 세상의 재미와 관심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그것을 비울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몸은 나왔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입니다. 말씀이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길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심각하게 들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13:4에는 왜 이렇게 말씀이 남아있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새를 마태복음에는 ‘악한 자’, 마가복음에는 사탄, 누가복음에는 마귀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단 마귀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집중력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할 만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사단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단에게 다 내어주고 만 것은 아닙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 우리가 사단에게 빼앗겨야 합니까? 시편 기자는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이라고 말했습니다. 곤고한 인생 가운데서도 우리를 살리는 말씀을 우리가 왜 사단에게 빼앗겨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속에도 사탄, 마귀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해야 할 것입니다.

2. 돌밭과 같은 마음입니다.
이 밭의 특징은 말씀을 받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받은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돌밭은 겉으로 보기에는 흙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땅을 파보면 바위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씨가 뿌려져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말씀의 뿌리를 내리기에는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말씀을 받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넘어지는 이유도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1절.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우리는 말씀 때문에 환희와 기쁨을 얻지만, 말씀 때문에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말씀으로 환난이나 박해가 생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말씀을 지킬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돌들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그 돌은 자신의 생각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으면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시험이 되어버립니다.
예배를 마치고 난 뒤에 인사를 나누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오늘 정말 큰 은혜 받았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하고 어떻게 그렇게 똑 같이 말씀하십니까?” 이 말씀은 다음에 자신의 생각하고 다르면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에 전혀 맞지 않는 말씀에 ‘아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말씀이 심령의 밭에 떨어질 때 나 자신의 생각이라는 돌을 자존심이라는 돌을 걷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성장이란 말은 나 자신의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주어진 말씀은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3. 가시떨기와 같은 밭입니다.
가시떨기 밭은 씨가 떨어졌을 때가 받아들이는 것은 일단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돌밭과 달리 뿌리를 내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마지막 결실해야 할 때에 그 결실을 방해하는 다른 기운에 의해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2b.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7절에 결실을 방해하는 것은 가시라고 합니다. 이 가시를 22절에는 설명하기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밭에서 결실하려고 하면 이 가시떨기, 가시덤불을 제거해야 합니다.
1) 세상의 염려를 잘라버립시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이 세상의 염려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
이는 이 사람의 관심이 항상 육신적인 것에 있음을 말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근심은 다 세상 것입니다. 대부분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해도 이룰 수 없는 허망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세상의 근심의 종착점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2) 재물의 유혹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염려의 구체적인 부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염려라고 하지 않고 유혹이라고 한 것은 이 부분이 우리에게는 더욱 현실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물질의 유혹은 받은 말씀의 은혜를 다 짓밟아 버립니다. 많은 사람이 결국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돈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믿음, 믿음 했지만 결국 그 사람의 행동의 마지막 기준은 돈입니다. 돈이 되면 신앙은 좀 접습니다. 돈이 되면 주일을 성수하는 것도 양보합니다. 하지만 돈을 버는 일에 그렇게 지장이 없으면 주일도 지키고 성경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재물의 유혹만 우리가 극복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신앙적 걸림의 70-80%는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이 세상의 대부분의 일과 관계가 돈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4. 좋은 땅입니다.
좋은 땅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 밭에서 나타난 모든 말씀의 장애물을 제거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좋은 땅을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눅8:15)
말씀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의 사상과 자신의 경험, 아집과 같은 것으로 말씀을 판단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하면 그냥 ‘아멘’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지식보다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역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밭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밭을 경작(기경)합시다.!

☞ 나의 마음의 밭은 어떤 밭인지 서로 말해봅시다. 그리고 결실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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