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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둘째주 /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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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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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 갈6:11-14
찬송> 27, 149, 150

여러분은 어떤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에는 육체로 자랑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b) 세상적인 자랑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 요일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통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학벌로는 당대의 최고의 학자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가문으로는 베냐민 지파 소속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을 거의 다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 사도는 이미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자랑거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우리는 여기에서 왜 바울이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십자가의 의미는 희생도 되고 사랑도 되지만 그 당시에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저주’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주의 상징을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십자가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지에 대해서 십자가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1. 그러면 왜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합니까?
십자가는 저주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 그 저주는 바울 자신이 받아야 할 저주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예수를 정말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을 혐오했습니다. 민족이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믿는 것 자체가 그에겐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본래 예수의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때문에 죽으신 것을 아는 순간 십자가는 그에게 가장 큰 사랑이 되었습니다. 자랑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저주의 대상자들이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소망이 없는 자이었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있는지, 그리고 결국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다 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자랑거리로 우리 자신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이렇게 살도록 만든 줄도 몰랐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이 죄의 결과를 지고 살고 있는 과정인 줄도 몰랐습니다. 마지막 심판이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자기 자랑거리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합니다. 14b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못 박혔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죽은 것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항상 반응하기를 요구합니다. 자신을 반겨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많은 유혹거리를 만들어 우리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에서 해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기 전 바울의 삶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
소가 논이나 밭을 갈 때에 주인의 의도대로 가지 않으면 채찍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채찍을 맞고 그 채찍을 이겨보겠다고 뒷발질을 하면 소만 더욱 고생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인생이 가시채 뒷발질하는 인생으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이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다 속죄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서 예수를 믿는지 말입니다.

2. 십자가로 감격합시다.
우리에게 다시 이 십자가의 감격이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무릎이 꿇어져 있을 때 우리는 살아납니다. 왜요?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 속에 있는 그 많은 고민거리는 하나님이 준 것입니까 세상이 준 것입니까? 솔직히 세상을 바라보다 생긴 것 아닙니까? 그것도 채우지 못할…
시97:7에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런데 이제 바울은 고백합니다. 간증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하여 죽었다고. 어떻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제 삶을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감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십자가의 사건이 이전에 한 번 있었던 추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십자가 때문에 다시 감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식들에 대한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으로 감격할 일이 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사업이 잘 되어 감격할 일이 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공부를 하고 난 뒤에 학위를 받는 일로 감격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때문에 더욱 감격하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십자가로 자랑합시다.
그리고 자랑해야 합니다. 이 자랑은 자기과시를 위한 자랑이 아닙니다. 이 자랑은 다른 사람이 이 자랑을 듣고 시기하여 그 사람도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의도된 자랑입니다. 바울은 롬11:11에 이방인이 먼저 구원을 받으면 이스라엘이 시기가 나서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감격하면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랑은 다른 사람을 자극시킵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감동합니다. 진실은 이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자랑합시다. 십자가 자랑합시다.

기독교의 역사상 순전한 십자가 자랑이 있을 때 교회는 부흥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교회의 정체 및 퇴보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우선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점검해 봐야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강단의 설교자들이 재미있는 설교, 교인들을 위로하려는 설교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강단에서 십자가 설교가 사라졌습니다. 단지 십자가는 고난주간의 주제일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감격하고 십자가를 자랑할 수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에 그럴싸한 포장을 하고 다녀도 실제 우리의 생활은 이전에 경험했던 구원의 아련한 추억을 우려먹기에 급급한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구합시다.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갈6:14b)라고 말했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히고’라는 말은 현재완료 시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현재까지 바울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쳐야 할 십자가의 은혜요 능력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감격이 되고 자랑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아래의 질문으로 서로 나누고 격려하고 뜨겁고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1. 나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3. 나는 십자가에 감격이며 자랑거리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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