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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세째주 / 선교의 동역자들 (롬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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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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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교 동역자들
성경> 롬 16:1-7
찬송> 19, 497, 518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했을 때 교회에 대해 했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면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딤전1: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누구보다도 깊은 신학적 사색과 기도, 연구를 통하여 기독교의 교리의 근간이 되는 서신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책상에서 성경을 들고 앉아 연구만 하는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신학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격리된 곳에서 기도만 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동서남북을 분주하게 뛰어다녔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학자 바울보다 선교사 바울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로부터 직접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고,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설립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에베소교회 등. 그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 중에서 교회의 기둥 같은 신실한 일꾼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보낸 서신을 선교서신이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중요한 한 가지를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바울의 선교는 결코 바울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서신을 보면 비망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그는 그의 선교사역에 잊어버릴 수 없는 동역자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선교는 절대 바울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바울의 비망록 속에 나타난 동역자 몇 사람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이 시대에 어떻게 복음의 동역자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말씀을 받겠습니다.

1. 뵈뵈
바울의 동역자 목록 중에 첫 번째 인물이 ‘뵈뵈’라는 여성도입니다.(1)
그러면 뵈뵈 자매는 어떤 동역을 한 것입니까?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2)
바울은 이 뵈뵈 자매를 로마교회가 극진히 영접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뵈뵈가 그 만한 영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뵈뵈는 이미 여러 사람과 바울에게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호자’라는 단어는 ‘후원자 구원자 조력자’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사실 그 당시에 여성에게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즉 어떤 공동체의 합법적인 우두머리나 대변인을 뜻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도울 수 있는 사람, 즉 물질적으로도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라는 이 여성도는 여성이지만 남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능히 감당하는 유력한 사람이었고, 그녀는 선교사들에 대하여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개인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많은 필요를 느끼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선교의 현장에서 일을 벌여놓고 긴급한 재정으로 도움을 요청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채우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쓰임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등장하여 바울을 감동시킨 든든한 후원자가 바로 뵈뵈 여성도였던 것입니다.

2. 브리스가와 아굴라(3-4)
이들 부부에 대한 기사는 행18장에 나옵니다. AD49년 경에 로마의 황제의 유대인 로마 추방령으로 인해 이들은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온 바울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직업이 바울과 같이 장막을 만드는 업이어서 이들은 바울과 함께 거하며 동역합니다. 이들이 바울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은 단지 함께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부부가 바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사건인지는 잘 모르지만 4절 끝에 보니, 그 당시에 많은 성도들은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선교와 관련된 이와 유사한 일들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만이 아닙니다. 갈4:12-15절에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은 바울을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2:30에는 에바브라 디도를 향하여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는 바울의 부교역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 역시 바울이 부탁한 사역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말씀을 읽고 위험 지역에서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가 이렇게 기록한 선교편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들을 통해 왜 바울이 제 1차 선교여행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고통과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또 2, 3차 선교여행을 떠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나를 대신 죽어줄 그런 사람까지 필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죽고 나면 나의 처자라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당당히 죽음의 복음 전선으로 충분히 나갈 수 있겠습니다.”

3. 안드로니고와 유니아(7)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대단한 영적인 거장인 바울을 만나기도 하지만 극히 인간적인 바울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때로는 외롭고 춥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의 영적인 아들이 디모데를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복음의 길을 막았던 사람들에 대한 불편함도 토로합니다. 그는 탁월한 선교사이지만 역시 또 한 명의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외롭고 힘들 수 있었던 그의 수감시절에 그와 함께 갇혔던 사람이 있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던 특별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누구입니까?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7)
바울은 딤후 1:16-17에서 오네시보로를 소개하면서 로마에 있을 때에 자기를 부지런히 찾아 만나 준 일을 감사하게 여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는 사람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선교사의 펀지 중 한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선교지에서 온 후 그래도 2년 정도까지는 후원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고국의 가족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전화도 걸려오고 편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2년 지난 후부터 그런 경험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매일 우체부가 왔다가는 시간인 오전 10시 30분에, 그리고 오후 5시에 아무에게로부터 오지도 않는 편지함을 뒤지는 중독성 습관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으면서 로마서16장 7절에 내 눈을 꽂혔습니다. 음침한 감옥에 갇혀 있을 바울을 생각하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곤 또 하나의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와 함께 갇혔던’ 이 구절을 보는 순간 나의 눈물은 인간적인 외로움과 섭섭함 때문에 거의 통곡할 뻔했습니다. 하나님 이런 사람까지 필요 없습니다. 가까이에 한국말로 이야기할 사람 한 사람만 보내주십시오.”
선교사들의 따뜻한 위로자가 되어줄 동역자는 없습니까?

빌4:3에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들 동역자들은 목회자와 선교사의 비망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책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10:41에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선교는 선교사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간 선교사요 우리는 보낸 선교사입니다.

☞ 나는 진정으로 보낸 선교사입니까? 보낸 선교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 문제로 서로 이야기해봅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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