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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둘째주 / 14만 4천명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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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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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4만 4천 명의 노래
성경>계14:1-5
찬송>259, 249

요한계시록은 그 구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천국이 천상에서의 천국이 되기도 하고 이땅에서 이루어질 천국이 되기도 합니다. 또 그것이 실제가 되기도 하고 상징이 되기도 하고, 계시록에 기록된 사건들이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 되기도 하고 일어날 사건이 되기도 하고, 일어나는 장소도 이 땅이 되기도 하고 천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 만큼 해석하기에 어렵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14만 4천 명에 대해서도 해석은 문자 그대로의 숫자냐 아니면 상징적 숫자냐로 나뉩니다. 오늘은 구체적으로 14만 4천과 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4만 4천 명’, 이들은 누구입니까? 먼저, 이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1하) 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성도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시온 산에서 말입니다. 이 시온 산은 예루살렘 도성을 말합니다. 이 도성은 회복된 천국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새 노래’입니다.(3) 새 노래란 무엇입니까? 성경에 새 노래에 관한 성구를 찾아보면, 그 성구들은 거의 다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난 뒤에 감격적으로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시98:1 -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새 노래’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에 두 번 나오는데 두 번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한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부르는 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감격스런 찬송을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부릅니까?
단순하게 ‘구원 받은 백성이다.’라는 답으로는 부족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이 구원의 노래를 감격적으로 부를 14만 4천 명이 어떤 사람인가 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1. 순결한 자입니다.
순결하다고 할 때 어떤 의미로 순결하다고 하느냐?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4상)
4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 14만 4천은 모두 다 장가를 들지 않은 숫총각들뿐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결의 의미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영적인 순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순결을 지킨다는 의미가 상징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는 ‘14만 4천’이라는 숫자도 상징의 숫자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14만 4천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집단들은 거의 이단 혹은 이단성이 짙은 유사기독교 집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은 14만 4천이라는 숫자를 문자대로 해석하여 초기 자신들의 숫자가 작을 때 자신들의 집단을 하나로 만드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숫자가 14만 4천이 넘고 나면 다시 다른 해석을 내 놓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랬습니다. 최근에는 신천지집단(교주:이만희, 본명칭-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이전엔 ‘무료성경신학원’이라 했음)이 그 예입니다.
성경에서 ‘음행’이라는 의미는 첫째는 불법적인 남녀간의 성 관계를 의미하고, 둘째는 성도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과 교회,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계21:9에 신부는 어린 양의 아내라고 되어 있어 결국 우리 예수님은 신랑이고 성도들은 신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신부가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그 분에게 시집가서 내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날이 감격적인 날이 되기 위해서는 신부의 정절, 순결은 필수적입니다. 신부로서 순결하지 못하다면 신랑을 만나는 날은 피하고 싶은 날이 되고,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이 반갑지 못하고 도리어 두려운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정절을 지킵시다. 딤전2:9에는 여인들이 자신의 몸을 단장할 때 하나님 앞에서는 몸을 값진 보석으로 치장하는 것보다 정절로써 단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딤전2:15에는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즉 여자의 정절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인데 그것이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처럼 고통이 따른다. 즉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좀 쉽게 이야기 해 봅시다. 여인이 결혼을 한지 며칠 되지도 안했는데 신랑이란 사람은 독립 운동한다고 나간 뒤에 감감 무소식입니다. 주위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으니 다시 팔자 고치라고 난리입니다. 친정 엄마는 사위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내 딸 저렇게 안 놔둘건데 하면서 사위 욕만 해댑니다. 그런 어머니 보고 있자니 또 자식으로 못할 짓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 많은 사람이 사랑한다면서 나와 결혼해 주면 일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프러포즈를 해 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아니야 내 남편은 살아있어. 언젠가 내 앞에 조국을 독립을 안고 나타날 것이야”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보다 훌륭한 남편은 없다며 아빠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아들에게 자랑하며 자긍심을 심어 줍니다. 끝까지 믿고 인내하고 기다립니다. 어느 날 조국이 독립이 되었습니다. 그 남편은 조국의 기발 아래 총사령관이 되어 그에게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의 14만 4천이 부를 노래는 이 남편을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모든 환난을 다 이겨내고 결국 개선장군으로 나타난 남편 앞에 선 여인의 감격과 눈물의 승리가(勝利歌)인 것입니다.

2.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4중)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어디로 데리고 가든지 따라가는 자들이 14만 4천의 대열에 포함되어 감격의 새 노래를 부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혹은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또 말합니다.
목자의 경력을 가진 다윗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가장 잘 묘사한 것이 ‘목자와 양’입니다.(시23:1)
요10:11에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면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선한 목자는 절대 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이 스스로 목자를 떠나면 그땐 상황이 다릅니다. 그때부터 양들은 온갖 위험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며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요10:3-4에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가 앞서 가면 그 음성을 듣고서 뒤 따라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양이 안전하기 위해서는 첫째 목자의 음성을 구분해야 하는 것과 둘째는 목자와 너무 멀어져 그의 음성을 못 듣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한 목자는 잃은 양은 찾도록 찾겠지만 이렇게 하여 찾게 된 양이 마지막 구원은 받았을지라도 14만 4천의 감격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합당한 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첫째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의 풍성함을 위해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에 ‘어디로 인도하든지’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의미는 길이 평탄할 수도 있고 험할 수도 있습니다. 가보니 좋은 곳일 수도 있고 정말 형편없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길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우리를 나쁜 곳으로 인도하실 리가 없다는 사실을 믿으며 목자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14만 4천’의 이 ‘새 노래’는 천상용(天上用)이기만 한 것일까요? 다윗을 보면 그는 이미 이 지상에서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시40:3) 천국은 너희 안(-너희 무리 가운데)에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눅17:21)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임이 14만 4천의 새 노래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리의 찬송과 경배가 새 노래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의 순결과 오직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각오와 결단의 헌신으로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이 노래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도 영적 14만 4천의 반열에 올라 감격의 새 노래를 우리의 입술에 담아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주님과의 관계에서 ‘신부’ ‘양’이라는 신분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나는 14만 4천의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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