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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둘째주 / 아홉유대인과 한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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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7-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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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제목> 아홉 유대인과 한 이방인
* 성경> 눅17:11-19
* 찬송> 295, 321


신앙생활은 상식적으로 해야 합니까? 그러면 상식적으로 성경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몰상식하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또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일반적인 법칙을 뛰어넘어 초월적으로 행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반적인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상황에서 상식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실 때는 상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것은 몰상식이 아니 초상식입니다.
보통 이런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식의 충돌 속에서 일어납니다. 즉 말씀대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알고 있는 상식대로 해야 하는가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또한 이런 기회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에서 이런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난 뒤에 나타내어야 할 우리의 행동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1. 일단 가 봅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어느 한 마을에서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난 사건입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활동 소식을 소문으로 접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멀리서 큰 소리로 예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들의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당시 유대의 율법에는 나병과 관련해서 제사장의 역할은 나병이 발병했을 때 제사장이 이것이 진짜 나병인지를 진단하는 책임과 또한 나병환자가 나았을 때 나았다고 판정을 하고 선언을 해 주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미 나병 판정을 받은 자들이고 이들이 이제 또 제사장에게 가야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나병이 깨끗이 나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의 병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무엇을 요청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뛰어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상식이란, 예수 믿는 나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지 않는 세상의 모든 다른 사람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을 믿고 있다면 믿음에 있어서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란 예수님의 말씀이면 그것이 상식에 어긋나더라도 믿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 열 명은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분명 제사장에게로 간다는 것은 나았기 때문에 보이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갔습니다. 결과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기록하고 있습니까?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b)
그래서 일단 가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기에 우리의 상식을 버리고 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나오는 열 명의 사람들이 모두 믿음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열 명의 나환자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자신들끼리 이런 말 저런 말, 갑론을박을 했을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듣던 예수님의 치유의 방법이 아니야, 이 모습으로 갔다간 도리어 더 큰 저주를 받을지도 몰라!”
그런데 결론은 예수님이 말씀대로 가 보자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분명 가면서도 투덜대는 사람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전체 분위기에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면서 깨끗해졌습니다. 만약 가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했기 때문에 믿고 가면 됩니다. 이해가 되면 좋겠지만 되지 않더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가면 됩니다. 가면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로 역사해 놓았던지 가면서 역사가 일어나든지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가면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요4:50-51을 보면 왕의 신하가 자신의 아들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왕읭 신하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내려가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게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요4:51)
왕의 신하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믿고 내려가는 길에 아들의 치유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길이란 확인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확인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길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가면서 길이 생긴 것이다. 자주 다닐수록 길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처음에는 불안할 수 있어도 계속해서 나아갈 때에 계속 가면 나중에는 당연한 길이 되어버리고 당연한 법칙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이제 상식이 되는 것입니다.

2. 나머지 아홉 사람 유대인과 한 사마리아인,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제는 우리가 은혜를 받고 난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봅시다.
열 명이 모두 깨끗함을 받았는데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를 표합니다.
예수님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17) 이 말씀에 예수님의 섭섭함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아쉬울 때)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자 자신들이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겨 급할 때는 주님을 찾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문제가 해결되자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실 은혜란 오직 이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주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자신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도 역시 자신의 집으로, 부모에게, 처자에게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찾아야 할 곳을 알았습니다. 다른 아홉 사람도 감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물론 마음만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히 돌아와 그들의 감사는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하지만 마음만 있는 것 역시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의 고백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유해 주시고 예배를 기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치유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바로 이 한 사람에게만 진정한 사죄의 선언이 주어졌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11:19)  진정한 감사와 예배에는 더욱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나의 신앙생활은 상식선에서만 이루어집니까 아니면 상식을 뛰어넘습니까?
또한 나는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서로 나누어보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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