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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네째주 / 천하보다 귀한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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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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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하보다 귀한 목숨
성경> 마16:25-27
찬송> 289, 295

사람의 목숨에 관한 한 우리는 두 가지 접근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타인의 목숨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목숨 또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중에 미국에서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난사사건은 타인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 모두를 하찮게 본 결과를 낳았습니다. 타인의 목숨을 존중하는 사람은 분명 자신의 목숨의 존귀함도 알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의 지도층의 사람과 유명인들이 자살하는 사태가 잦아졌습니다. 대기업의 사장도, 대학총장도, 정치인도 자살을 합니다. 더욱 당혹스러운 사실은 이 자살이라는 문제가 기독교인들에게도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자살한 유명 연예인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 먼저, 자살은 심각한 범죄행위입니다.
1)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그것을 지은이가 있고 그 지은이가 지은 것의 주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가 계시고 그 분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입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고 그 분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은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따라서 사람이 자살을 한다는 것은 생명은 결국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며, 그것은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결국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2) 십계명의 제 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6계명을 다른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나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 역시 살인 행위입니다. 그는 6계명을 어긴 자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할 대가를 동일하게 치러야 합니다.
3)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의 몸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몸에 담겨진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을 폐기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1:27-28) 이 형상은 내적인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이 가지신 속성을 우리 인간에게도 넣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신의 성품’(벧후1:4)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 외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2. 자살과 구원과의 관계를 말씀드립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을 했다고 해서 항상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생각 속에 자살을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는 이유는 아마도 성경에서 자살한 대표적인 두 사람, 사울과 가룟 유다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 왕을 생각해 봅시다. 사무엘상 31장에 보면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게 되고 그는 적의 활을 맞아 중상을 입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관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관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 명령을 거역합니다. 이에 사울은 자신의 칼 위에 엎으려져 자살을 합니다. 그는 곧 이방인의 손에 죽게 될지라도 자살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가룟 유다를 생각해 봅시다. 그의 목매어 자살을 한 이유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과정을 보다가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 14: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자살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자살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합니다.
자살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이유도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자살을 병의 진행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우울증의 치명적인 결과가 자살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주부의 30%가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살이라는 이 문제에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도 우울증세로 자살과 같은 상황에 내몰린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상대로 승리한 후, 변하지 않는 주위 상황으로 인해 심한 공허감을 느꼈습니다. 그 후, 그는 영적으로도 힘을 잃고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19:4)
선지자들에게 도 이런 증세가 나타났으니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살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정죄부터 할 것이 아니라 의학적인 시각에서 보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영적인 담력을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바울은 당시의 유약한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0-11)
다윗의 경우, 아말렉이 처자와 모든 재산을 다 탈취해 간 때에 그를 따르던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여 달려들 때에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 30:6)
2)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해야 합니다.
혼자가 된 고립된 상황에서 일을 저지릅니다.
친구 목사가 그렇게 외롭고 힘들 때에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나도 정신이 없고 여유가 없었지만 그가 힘들 때에 내가 그들 돌아보지 않는다면 내가
힘들 때에 그들의 도움을 요청할 면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 나는 혹시 자살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나누고,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인 구역원들과 함께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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