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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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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6-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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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중학교 한문책에서 배웠던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하다 죽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亡者)에 상관없이 그 사람을 소개할 때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의 이력을 소개합니다. 그때는 주로 그 사람이 종사했던 업의 직책을 소개하게 되는데, 만약 그 사람이 공직에 있었다고 하면 그의 관직이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자리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가장 높은 관직 하나만 중요합니다. 만약 국회의원을 하고, 장관을 했더라도 그 사람이 국무총리를 했다고 하면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이전에 어떤 교인의 장모님의 장례를 부탁 받고 장례예식을 집례 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장모님은 우리 교회 성도는 아니었고 오랫동안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고인(故人)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자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이 입관예배를 드렸습니다. 입관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어떤 분이 제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큰 실수를 한 듯 “목사님, 죽은 사람이 권삽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내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그 분의 신앙이력에 대해 좀 더 물어본 뒤에 예배를 인도할 걸...”하는 미안함이 들었습니다. 제가 고인(故人)을 ‘성도’라고 지칭하며 예배를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곧 권사와 성도 중에 어떤 것이 더 영광스러운 호칭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성도’였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고인이 권사라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의 답도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사를 성도라고 부르면 크게 결례를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왜 그럴까? 그것은 이미 교회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직분에 대한 계급적 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은연중 우리의 생각에는 남자 평신도의 경우 ‘성도→서리집사→안수집사→장로’, 여성의 경우 ‘성도→서리집사→권사’라는 계급구조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직분에 대한 계급적 사고의식을 속히 고치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도 계속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을 할 것이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하게 되면 분한 마음을 먹게 되고, 그 노력의 결실을 보게 되면 그 이후에는 그에 따른 보상(대우,예우)를 기대하게 되고...
 
  이런 직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주님이 부탁하신 사명을 효과적으로 이루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집사도 권사도 장로도 목사도... 하나님 앞에서는 성도일 뿐이며 그것 외에 더 존귀한 명칭은 없습니다. 물론 마지막 천국에 가면 받은 직분에 대한 책임과 그에 따른 보상은 분명 따를 것이지만 목사라고 해서, 장로라고 해서, 권사라고 해서, 집사라고 해서 신실한 평신도보다 더 봐 주실 일은 분명히 없어 보입니다. 그것은 어떤 직분이든 하나님 앞에는 ‘성도로서’ 존귀하고, ‘성도로서’ 서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우리가 지상교회에서 그 어떤 다양한 직분을 가졌을지라도 이 명칭 하나에 다 감춰질 만큼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 16:3)
 
  그래서 저는 미리 유언을 해봅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관을 덮는 천에 ‘이정우 목사’라고 적지 말고 ‘이정우 성도’라고 적어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도 ‘성도 이정우’라고 적고 혹시 이면에 간단한 나의 이력을 적을 양이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어떤 교회의 목사로 섬기다’라고 기록해 주면 그것으로 족하겠습니다.”성도라는 명칭에 비할 다른 존귀한 명칭은 없습니다.(20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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