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레터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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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6-04-16본문
장산레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때가 2011년이었으니 벌써 5년이 넘었습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필요에 따라 ‘목회단상’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으니 그 역사는 더 오래 되었습니다.
장산레터는 부족한 목회적 기능을 보완한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즉 이 코너를 통하여 홍보, 교육, 위로, 격려, 권고 등... 이런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단어가 ‘소통’입니다.
저는 장산레터를 통해서 저의 생각을 성도들에게 전달합니다. 설교를 통해 말씀하지 않느냐 말할지 모르지만 설교는 엄격히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산레터는 담임목사의 생각이 담겼습니다. 그래서 장산레터를 통해 저는 솔직한 저의 생각을 계속 성도들에게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저의 생각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리더십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보스와 리더는 다릅니다. 보스는 권력으로 따르게 하는 자이지만 리더는 이해와 설득과 진심으로 따르게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 보스와 같은 지도자를 리더로 오해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중에는 그런 목사님들이 있는 교회가 부흥했던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교회와 목사의 마지막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와 성도들 간의 소통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시간과 공간적 제약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목사라는 직책이 주는 거리감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 개인적으로는 말수가 적은 성격적인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장산레터가 더 소중한 것 같습니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이나, 오해가 될 만한 사안이나, 교회의 중요한 행사에 대한 설명이나 교회의 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것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장산레터는 그런 공무적인 사안에 대한 이해나 협조를 구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담임목사의 사적인 생각과 마음도 노출시키면서 ‘사람 이정우’를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통이라는 저변에는 성도들이 나를 이해해야 진정한 리더십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극히 사적인 집안사와 가족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쓴 적이 있고, 교회적 상황이나 목회와 전혀 상관이 없는 나의 감정을 기록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목자들에게 목회일기를 기록할 때 ‘목장의 상황과 목원들의 기도제목만 꼭 기록할 필요는 없다. 목자 목녀의 극히 개인적인 상황이나 생각을 기록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도 그것을 통해 목자목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통이란 일방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성도들이 저에게 말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의 목회적인 부분은 목자를 통해, 행정적이고 제도적인 부분은 사역부서장을 통해서 전달해 주십시오. 당회는 모니터링 된 사안에 대해 공적인 결의가 필요한 것은 결의를 통해 보완해 나갈 것입니다. 성도들이 담임목사에게 직접 할 수도 있지만 모세시대에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을 세운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이런 통로를 통해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통로를 이용할 수 없는 사안도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언제든지 직접 찾아오는 것은 열려 있습니다. 건의함 같은 것은 익명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괜찮지만 익명인 경우는 익명 뒤에 숨은 우리의 죄성을 사탄이 이용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소통은 자기의 뜻이 관철되는 것과 상관없이 중요합니다.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문을 닫아버리면 오해가 생기게 되고 이것은 불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저는 성도들과의 소통의 창으로 장산레터를 언급했지만 성도들 간에도 소통이 힘들 때에는 상한 마음을 자존심으로 붙들기보다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한 번쯤 보내보면 좋을 것 같습니 다.(2016.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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