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그날이여! -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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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6-09-10본문
(온천교회 윤평원 원로장로께서 주중에 저에게 보낸 카톡 내용을 그대로 발췌하여 올립니다.)
그저 별다른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보내고 그렇게 사는 게 우리들의 일상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살아가면 세월을 갉아먹고 사는 세월충(歲月蟲)이나 세상충(世上蟲)이 되고 말지 않을까? 저마다 잊을 수 없는 날이 따로 있고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나아가서는 온 민족이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날도 있다. 일테면 생일은 자신이 제일 잘 기억하는 날일테고 광복절이나 삼일절 등은 온 국민이 다같이 기억하여 기리는 날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마땅한데 그러지 못하여 그냥 넘기는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매스컴에서는 금주의 역사라 해서 유명인사의 생일도 기일도 역사적 사건도 잘 안내를 하더니만 이번 주 오늘 9월 5일은 별다른 말이 없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어떤 날인지 알고 보면 그냥 넘길 수 없는 날이다. 왜냐하면 이날이 우리나라 선교 역사에 선교의 단초를 닦은 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로부터 꼭 150년 전, 한반도에는 쇄국(鎖國)의 장벽으로 문명의 빛이 비춰 들지 못하고 무지와 폭압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기막힌 살육(殺戮)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1866년 벽두에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이 내려져 프랑스 신부 열두 명, 신도 팔천 명이 처형을 당하였다.
그런 판국에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한반도에 선교의 문을 기어이 열려고 어기찬 발걸음을 내딛은 선교사가 있었으니 그 이름 토마스(Robert J. Thomas)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파송으로 중국에 파송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혼의 단꿈을 미처 깨기도 전에 풍토병으로 아내를 잃었다. 이로 인하여 잠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무렵 한국에 들어와 서해안 지역을 여행하며 두어 달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에 대한 사전 정보도 갖게 되었다. 그 후 중국에서 만난 한국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우리말을 배우면서 한반도의 소식을 듣고 한국에 대한 선교 열정을 품게 되었다.
그런 판국에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한반도에 선교의 문을 기어이 열려고 어기찬 발걸음을 내딛은 선교사가 있었으니 그 이름 토마스(Robert J. Thomas)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파송으로 중국에 파송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혼의 단꿈을 미처 깨기도 전에 풍토병으로 아내를 잃었다. 이로 인하여 잠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무렵 한국에 들어와 서해안 지역을 여행하며 두어 달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에 대한 사전 정보도 갖게 되었다. 그 후 중국에서 만난 한국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우리말을 배우면서 한반도의 소식을 듣고 한국에 대한 선교 열정을 품게 되었다.
그해(1866) 8월 초에 선교본부에 보낸 그의 선교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그의 한국 선교에 대한 열망(熱望)을 보이고 있다. “아주 잔인하고 사악(邪惡)한 대학살이 최근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들어가 선교의 문을 여는 일이 중요함을 깨달아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중국에 들렀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한반도 입항함에 따라 통역관을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 배에 통역관 신분으로 승선하였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성경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을 많이 싣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배는 좌초되고 관군이 배에 불을 지르자 배에 실었던 성경을 뭍으로 던졌다. 관군에게도 구경나온 사람들에게도. 그 성경을 받은 사람은 상당수에 달했다. 당시 스무살의 이신행씨는 평양 최초의 여성도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은 평양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12살의 최치량 소년은 성경을 받았으나 성경을 전해 준 파란 눈의 선교사가 참수형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영문(營門) 주사(主事) 박영식에게 받은 책을 돌려주고 말았다. 영문주사는 그 책으로 자기 소유의 집에 도배를 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후 소년 최치량은 성인이 되어 영문주사 소유의 집을 사서 여관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평양을 방문한(1891년) 사무엘 오스틴 모팻(마포삼열) 선교사와 한석진 목사님이 그 여관에 머물게 되었고 온통 성경 말씀으로 도배된 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관 주인인 최치량과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박영식도 예수를 믿게 되고 그 여관은 예배장소로 쓰였다. 이게 곧 평양에서 개신교 최초의 교회당인 널다리골교회였던 것이다. 이 교회는 다시 한자식 이름으로 고쳐 장대재교회, 다시 옮겨 짓고 장대현교회로 바뀌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장대현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 교회, 이 땅에 성령의 바람을 최초로 일으켜 100만인 구령운동의 본산이던 그 교회인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신 말씀대로 순교하신 ‘한 알의 밀’이 되신 토마스 선교사님의 그 거룩한 순교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는 날이 되었 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적는다.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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