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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 집사의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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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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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빌립 집사의 전도
성경> 행8:26-40
찬송> 256, 268장

●들어가면서
지난주의 말씀의 제목이 ‘빌립의 와 보라’였습니다.(빌립은 예수님을 만나 그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이 사실을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와 보라’는 강청에 나다나엘은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자 그도 역시 빌립처럼 예수님이 구원자, 메시야임을 알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우리 주변에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이들을 열심히 주님께로 인도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만나 그들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도 빌립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빌립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주의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빌립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빌립 집사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집사 빌립의 전도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전도’라는 말을 사용할 때 더욱 어울리는 사람은 집사 빌립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 빌립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 빌립의 전도 기사는 없고 집사 빌립의 전도 활동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이 빌립 집사의 전도 활동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 전도는 모든 성도들의 기본 사명입니다.(5 - 집사 빌립의 전도를 보고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태동한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는 부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예루살렘 교회는 구제하는 일로 조금 소란스러워집니다. 그 일은 사도들의 정상적인 목회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특별히 일곱 명의 집사를 세워 구제하는 일을 전담시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 집사들의 구제 활동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오히려 이 집사들의 전도 활동에 대한 기록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집사로서의 직분을 소홀히 한 것입니까?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집사의 직분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전도의 일에도 열심을 낸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치려 하시는 것은, 교회 내에서 우리가 받은 직분 외에 우선적으로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입니까? 전도자로서의 사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집사이기 이전에, 장로, 목사, 구역장, 권찰, 성가대, 교사이기 이전에 복음 전파의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일곱 집사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스데반입니다. 성경에 그의 관해 이야기할 때에도 그의 집사의 직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도자로서의 모습을 밝히는 것에 모든 것을 다 할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을 말할 때, 전도자 스데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스데반 사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그의 순교의 현장에서 그의 죽음이 마땅하다며 능멸과 조소로 죽이는 사람 편에서 증인을 서 주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후에 주님을 위해 역시 순교한 바울이었습니다. 나는 이 바울이 딤전1:13에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했을 때 그 중심에는 스데반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다음, 오늘 본문에 빌립 집사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에도 그의 집사로서의 교회 내 역할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역시 집사였지만 성경은 전도자로서의 빌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였던 빌립이 사마리아에까지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8:5)

성도 여러분, 전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기본 사명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교회 내의 직분과 관계가 없습니다. 직분이 있고 없고가 아니고 누구는 집사이니 전도해야하고 장로이니 더 많이 해야 하고,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다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 외에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사명은 없습니다. 교회의 다른 직분을 감당해야하기 때문에 전도를 멈추거나 보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일 때문에 오셨습니다. 막1:38에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2. 하나님은 전도를 안 하면 하게 하십니다.(8:1,4) 전도를 안 해도 괜찮은 상황이 되면 그때는 절망적인 상황임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성경에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하게 되는 경위를 보십시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환난과 핍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전도 구호 중에 이런 구호가 있었습니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

정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교회나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하도록 만드십시다.
모일 때는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고, 또 때가 되어 흩어질 때는 또 흩어져 전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일 때 모이지도 않고 흩어져야할 때 흩어지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모일 때는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흩어져야할 때는 전도를 위해 흩어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실 때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를 이루려는 비전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를 기반으로 해서 세계 선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것은 예루살렘에만 앉아 있어서는 이룰 수 없는 비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으니 교회 내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돈은 있고 할 일이 없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전에 농촌에 졸부들이 생긴 적이 있었습니다. 졸지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농토가 도시계획에 포함이 되고 갑자기 자신들이 일할 농토는 없어졌고 돈은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 패가망신 당했습니다.
교회도 역시 그렇습니다. 교회가 돈은 있고 할 일을 찾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자 물질의 헌신자들이 생겼습니다. 헌금하는 사람, 자신의 토지를 내어 놓는 사람(바나바)들이 속속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곧 예루살렘 교회는 불평하는 무리들이 생겼습니다. 누구는 구제를 해주고 누구는 왜 구제를 안 해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집사 제도입니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가 빨리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교회를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환난 닥쳐왔습니다. 사람들이 핍박을 피하러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복음을 위해 흩어지지 않으니 하나님이 환난이라는 방편으로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흩어진 곳에서 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이방인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한 ‘안디옥 교회’입니다.
빌립의 전도도 이렇게 해서 시작됩니다. 그는 핍박을 피해 사마리아로 갔고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는 하나님의 불타는 소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희생과 투자를 하고 하나님이 그냥 지켜보고 계시겠습니까?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신 투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1)하나님 자신의 희생 -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 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장24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한 알의 밀’은 누구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썩는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희생함으로,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2)전도자들의 희생 - 하나님만이 희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희생에 동참한 자들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기도해 주었기에 내 심령이 열려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 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 덕분에 내가 오늘 예수 믿은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전 인구의 1/4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통계를 내놓을 만큼 부흥하였습니다. 전 세계 교회가 놀라고 부러워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축복을 누리게 된 배후에는 엄청난 피가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피와 눈물과 땀은 계속하여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27살 때에 선교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중국으로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온 토마스 선교사, 그러나 중국으로 건너오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중국 한 모퉁이에 붙어 있는 한반도에 사는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민족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말로 된 성경책을 배에 싣고서 대동강을 따라 올라왔습니다. 그 때는 대원군이 한참 쇄국 정책을 펴고, 카톨릭 신자들을 잡아 죽이는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을 전해 주려고 노력을 하다가, 결국 우리 관군들의 공격에 의해 배가 불타게 되고, 그는 강변으로 끌려 내려 칼날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순교하는 그 순간에 그는 자기 목을 치는 사람에게 성경을 던져 주며 "이것을 읽어보시오."라고 소리치고는 죽었습니다. 그를 칼로 친 사람이 그 성경을 주어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읽고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피가 그 강변에 흘렀기에 그 피값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이 땅에 와 쏟은 수많은 벽안의 선교사들의 피와 땀을 먹고 우리의 생명은 싹텄고, 한국교회라는 나무는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기초하고 있는 이 희생의 반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양화진에 가면 많은 사람들의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세기 전에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풍토병에 걸리고 적응하지 못해서 죽은 어린아이들의 무덤과 어떤 선교사 부인의 무덤이 있습니다. 명대로 살지 못한 젊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명의 선교사들입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투자가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값을 치르면서 복음이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무관심하면 환난이라는 처방을 내려서라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아무 일이 없는 교회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복 받은 교회입니까? 다행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포기하신 교회입니다. 다른 곳으로 촛대를 옮기신 것입니다.

3. 가면 있고 안 가면 없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중요합니다.(26-27)
“가면 있고 안 가면 없다” 이 말은 고구마 전도 왕 김기동 집사의 구호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빌립이 사마리아 전도 후에 하나님이 빌립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십니다. 26절입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하나님은 빌립에게 광야에 내려가서 전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빌립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 환난으로 많은 것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사마리아로 내려왔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 깨닫고 여기서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라도 귀 기울며 순종하며 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광야는 아닙니다. 광야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전도 안 하려고 하는 것 아니니까 하나님 보낼 곳을 보내십시오. 성읍으로 보내시든지 도시로 사람이 있는 곳으로 보내셔야지요.”
그러나 빌립을 보십시오. 27절 말씀입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가서 보니’ 있더라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이디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광야 그곳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갔더니 복음 전할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래서 순종하여 가야하는 것입니다. 가면 있습니다. 우리가 못 갈 곳은 없습니다. 어디든지 가십시오.

오늘날은 이전처럼 전도가 잘 안된다고 말합니다. 교회성장학자들이 국민소득 1만불이 되는 나라마다 전도가 안 되고 교회성장이 정체되다가 신자들 수가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자료를 내어놓았습니다. 서구라파나 미국이 그랬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1만불이 되었다가 IMF로 다시 떨어졌습니다. 한편으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자료를 참고해야하지만 나의 것으로 믿고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할 것입니다. 암으로 판정이 나서 의사들이 몇 개월 살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은 의학적 통계입니다. 그것에 얽매이는 사람은 그것밖에 살지 못합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일찍 죽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그 통계가 전혀 적용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각 교회의 문제는 전도를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다들 전도한다고 하지만 형식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전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전도가 안 된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도 부흥하는 교회는 역시 부흥하지 않습니까? 신도시에 교회당 건물을 세워두고 몰려드는 사람으로 인해 부흥된 교회 말고도 부흥하는 교회는 부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안 되는 성도, 안되는 교회에 우리의 시선을 두겠습니까?
우리는 오늘날 부흥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능력이 없어졌고 교회는 생명이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즉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발을 아름답게 보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는 복음전할 영혼이 항상 있습니다.

4. 특히, 예비 된 영혼이 있습니다.(28)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27) 이제 그의 나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처럼 예배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내시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내시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10장에 보면 이탈리아의 백부장 고낼료 역시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안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이 내시는 유대인의 절기에 맞추어 먼 길을 왔습니다. 절기가 마치자 다시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싶었으나 항상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병거 위에서 뜻을 알지도 못하는 성경을 읽으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때 빌립이 가까이 가서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이 무슨 뜻인지를 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빌립의 전도가 시작되고 결국 그 내시는 가던 길을 멈추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 이렇게 예비 된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도를 바라는 예비 된 영혼이 있습니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기를 바라고 있고, 또 때로는 아주 소극적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이미 열어 놓으신 분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여는 작업을 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은 예비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니라 하여 내일도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전혀 아닌 사람이 내일 가보면 마음 문을 열고 있습니다. 통계상 한 사람이 결신하기까지 16번의 접촉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방문과 전도의 입술은 그 16번의 접촉 중에 또 한 번의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그들은 어느새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형 에서의 마음을 하루 밤을 지나는 동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다시 재방문할 때 그들의 상황이 바뀐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맺으면서 - 복음 전파를 영광으로 여기며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일하다가 생을 마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요, 대영 제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아프리카의 개척자 리빙스턴이 16년간 밀림에서 선교하다가 잠시 영국에 귀국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27번째 말라리아에 걸려 사선을 헤매다가 아직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사자에게 물린 한쪽 어깨와 팔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마치 썩은 나무토막 마냥 몸에 힘없이 달려 있는 나약한 모습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설교에서 이렇게 도전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영 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놓고 즐거워하지 아니한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서 많은 희생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하나님께 진 큰 빚의 작은 부분을 갚았을 뿐인데, 이것을 어찌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장차 영광스러운 소망과 복된 상급을 약속 받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희생이 되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한다라는 말과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절대로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심정을 가지고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아멘-(주후2002.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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