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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의 “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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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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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빌립의 “와 보라”
성경> 요1:43-51
찬송> 197, 257장

●들어가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장산2002-jump400비전’을 두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 비전이란 장산교회가 2002년을 넘기기 전에 출석교인 400명을 넘자(jump)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왜 ‘점프400’을 해야 합니까? ‘점프400’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일부 성도들에게서는 이 ‘점프400’이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프400’을 금년을 넘기기 전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우리의 소원으로 간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주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생각은 금년에 300명 선을 넘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었습니다. 180명의 성도들이 300명 선을 넘은 것만으로 정말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금년 수준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9월, 10월을 지나면서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주님의 간절한 소원인 전도를 다른 교회, 다른 성도가 아니라 우리교회, 우리 성도의 가슴에 품게 하셨고, 또 돈 때문에 걱정할까봐 “돈이 문제냐?”하시면서 헌신된 분들을 통해서 전도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헌신된 분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넉넉해서 낸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방편을 통해서라도 전도에 동참하기를 소원하시는 분들의 마음이 담긴 헌금이었습니다. 성경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에는 우리의 전도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금년 우리의 소원이 ‘점프400’이어야 하는 이유는 )
이 일이 우리가 잘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 하나 둘씩 대나무 걸린 집이 늘어간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이 지역의 영적 성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짓들은 신(神)을 받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이라는 것이 다 귀신(鬼神)입니다. 마귀의 수하에서 놀아나는 귀신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며 오늘도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온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려 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지역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나 혼자만의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많은 문제는 나 혼자의 문제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부모의 일로 고민합니다. 형제의 일로 고민합니다. 회사일로 고민합니다. 더불어 행복해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일이 여러분과 관련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일을 이 시대에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전도라는 말만 들어도 부담이 되시는 분들이 있으시지요.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쉬운 전도의 한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전도의 방법이 쉽다고 해서 그 결과도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전도한 전도 방법을 통하여 우리도 이렇게 전도할 수 있음을 생각하고 전도에 힘 얻기를 원합니다.

●마음에 있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 중에 빌립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한 동네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될 사람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난 다음날 길을 지나다 빌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나를 좇으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헌신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알았는지는 4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모세가 율법에서 기록해 놓았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구약 성경에서 오리라고 말한 구원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했습니다. 기뻐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 사실을 전하고 알리고 싶었습니다. 자기 혼자만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자기 혼자만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되니 그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나다나엘과 빌립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정확하게 성경이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빌립은 이 나다나엘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가 다른 많은 사람을 두고 나다나엘을 찾아간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정말 함께 예수 믿었으면 좋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시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여러분의 대상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에게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초청할 대상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중심으로 이 말씀을 더욱 구체적으로 나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상자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 함께 신앙생활 했으면 좋을 것 같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저는 여러분이 많은 사람에게 접촉하고 더 많은 사람을 초청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많은 사람을 접촉하다 보면 그 중에는 분명 마음이 열린 사람도 있고, 누가 인도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을 만나도록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안 해도 3명 정도는 우리가 대상자를 삼고 기도하면 경험상 하나님께서 한 명은 일을 성사시켜 주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30명에게만 접촉하면 10명은 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사람들을 만나면 다른 이야기는 잘 하는데 전도하고 교회가자는 이야기는 잘 안하거든요. 어떤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 보세요.
“나 정말 중요한 부탁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없겠습니까?” 무엇이냐 물어보면,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나 신앙으로 새 삶을 산 탈렌트가 와서 신앙 간증하는데 내가 다른 사람보다 당신을 꼭 초청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신앙생활은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를 가면 정말 평안을 얻어요. 또 제가 다니는 교회는 정말 좋거든요. 8일 날에는 우리교회 목사님이 직접 말씀을 전하는데 들을 때마다 새로운 용기와 각오가 생긴답니다.”

어떤 사람은 이번에 내가 몇 사람 안 데리고 가면 우리교회 목사님에게 찍히니까 꼭 좀 부탁 들어줘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로 실적 위주의 직장에 나가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사정하면 통하는 경우가 많이 있데요. 그렇게 해서라도 그 사람이 올 수 있다면 제 이름 팔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최후의 방법으로 사용하세요.

아직도 대상자가 없는 분들은 이제라도 절대 늦지 않습니다. 빌립처럼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사람부터 생각하십시오.

●냉담한 반응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상)
여러분이 열심을 가지고 나간다고 해서 모두가 다 좋은 반응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전에 기독교에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여러분의 말을 막아 방해할지도 모릅니다. 이전에 기독교인에게서 상처를 입었던 사람이 여러분을 욕할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참 진지하게 말했어요. “우리 민족이 그렇게 기다려온 사람, 모세가 율법에 말하고 또 여러 선지자가 말한 사람 그 사람을 내가 만났는데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이다.”
그런데 이 진지한 빌립의 말에 나다나엘의 답을 보십시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의 말은 원문상에서 ‘나사렛’이란 말로 끝이 납니다. 영어의 순서가 원어와 같으니까 제가 영어로 말해보겠습니다.
“Jesus son of Joseph from Nazareth.”
이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뭐 너 ‘나사렛’이라고 했니?” 하면서 바로 말을 받아 비난하듯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 역시 ‘나사렛’이라는 말을 먼저 합니다.
“out of Nazareth” - “나사렛 사람이라고!”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벽촌에 불과하였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사투리를 사용하며, 교양이 부족하고 이방인과 교제한다는 이유 때문에 멸시를 받았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정통했던 나다나엘이 나사렛이란 말을 듣자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그 당시로 봐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빌립의 진지함에 비해 나다나엘의 비난조의 말은 너무 심한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간절한 말을, 우리의 진지한 초청을 그들은 너무 쉽게 거절하고 멸시하고 심지어 모욕적으로 말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환대해 줄 것을 예상하기보다는 여러분을 멸시할 것을 먼저 예상하는 것이 나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우리의 대적은 너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합시다. 주님은 이제 우리를 보내실 때 우리만 보내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은총으로 항상 함께 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으십시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심지어 우리는 전도하다가 모욕과 창피를 당해도 이익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한 번만이라도 - “와 보라”(46하)
진지한 초청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해 버리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어떻게 합니까? 빌립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와 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의 말을 못 믿겠거든 네가 직접 와서 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 대면해 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타난 빌립의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빌립은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감격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소개하였습니다. -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지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예수니라”
그래도 나다나엘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때 빌립이 했던 말이 “와 보라”였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노력하는 것보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이 더욱 좋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만난 그 예수님을 나다나엘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와 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저런 방편으로 노력해 보고 힘들면 이 말을 그대로 쓸 수 있습니다. “와 보라” 우리가 예수님을 소개하고 전하는데 무엇인가 어렵게 느껴지면 직접 교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네가 와서 한 번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 오라고 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이라고 교회에 나와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기도하고 준비된 것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저는 전도대에게 이런 방법을 잘 사용하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전도 훈련 잘 받아서 스스로 복음을 전하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분업화, 전문화 된 사회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교회가 곳곳에 없었기에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전하며 현장에서 직접 전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이것을 못하면 교회로 인도하는 역할이라도 잘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전도와 인도는 다릅니다.
이번 기회에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전도보다도 인도의 역할입니다.

저도 저의 태신자들을 이렇게 인도하려고 합니다. 대부분 바쁜 사람들을 붙잡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신분을 밝히고 다음에 제가 저의 교회에 한 번 초청할 테니 꼭 오시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다음번에 가서 “저번에 ‘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가서 하신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고 말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초청장을 정중하게 줄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될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많은 사람이 또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댈 것입니다. 그들의 핑계는 대부분 교회가 싫어서 못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들 그때는 시간이 안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좋습니까? “5일 목요일에는 사정이 있어 안 되신다고요? 그런면 그 다음날 6일 금요일에 오십시오.” “평일에는 안 된다고요? 그러면 휴일인 주일에 오십시오.” “밤에는 시간이 안난다고요? 그러면 주일에는 낮 시간이니까 주일에 오십시오.” “그런데 마침 그 때는 결혼식에 가셔야 한다고요? 그러면 12월 마지막 주까지는 앵콜 출석 주일이니까 그때는 꼭 오십시오.” 그러면서 그들이 가능한 약속일을 단단히 받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12월 첫 주가 되면 또 한 번씩 확인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강청하는 자세
누가복음 11:8에 “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강청해서 우리의 강청을 뿌리치지 못해서라도 교회에 나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식은 인도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기 싫어하는 사람, 데려다 놓으면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가?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와서 본다고 해서 예수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답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이었던 나다나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47에 보니 나다나엘은 빌립의 “와 보라”는 강청에 예수님께로 가게 됩니다. 47-51까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 그의 생이 180도 바뀌어 버립니다.

우리에게도 충분히 이런 일은 가능합니다. 혹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본문을 다하고 그들은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들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책임을 벗을 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복음은 당장에 결실하지 못할지라도 때가 되면 결실하게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일에 하나님의 역사를 구하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 한 순간에 변화된 것은 나다나엘이 경건한 사람이었고 영혼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예수님이 보았다고 했는데 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그는 기도하고 묵상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대상자가 준비된 영혼, 예비된 영혼이기 위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받을 때 옥토와 같이 되어 말씀을 받도록 말입니다.

●하요한 선교사
마지막으로 이전에 한 번 말씀한 적이 있었던 우리 교회 후원 선교사 하요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독실한 그의 기독교 친구의 강청에 못 이겨 한 번 교회 나간다고 나가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친구가 그들 위해 기도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는 한 번의 친구 교회 부흥사경회에 참석하여 그의 인생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직장을 그만 두고 신학교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한 번의 기회가 한 사람의 생애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비전을 주시고 함께 하시기를 원하심은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시고 우리로 복을 받게 하심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물론 이 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자들은 더욱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잘 사용해서 주님의 기쁨이 되고 복과 넘치는 은혜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아 멘-(주후 200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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