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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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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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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집안의 탕자
성경>눅15:25-32
찬송>93, 269장

●들어가면서
누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 세 개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비유의 공통점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에 있습니다. 첫 번째 비유를 ‘잃은 양 비유’라고 합니다. 두 번째 비유를 ‘잃은 드라크마 비유’라고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과 관련된 비유를 ‘잃은 아들의 비유’, 다른 말로는 ‘탕자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탕자의 비유 중에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전반부의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한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둘째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근심거리였습니다. 이 둘째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보다 독립해서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기회를 보고 있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주면 자신의 뜻을 펼쳐 부자가 되어 오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잘 아는 아버지는 몇 번이고 말렸지만 계속 재촉하는 아들의 요구를 결국 들어주기로 하고 둘째에게 돌아갈 재산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째는 독립하자마자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시작하였고 얼마가지 않아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렸습니다. 거지 신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빌어먹기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돼지에게 주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그것마저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불효한 자식인 것을 알지만 살기 위해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돌아갑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뵐 면목이 없어 아버지가 어떤 질책을 하더라도 달게 받을 각오를 하고 또 아버지가 결국 집에 들이지 않고 내치면 아버지 집의 종으로 써 달라고 애원할 작정으로 걸음을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집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달려와서 자신을 품에 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자신을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종으로 써달라는 말에 아버지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라고 하시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집에 있을 때에 경험하지 못했던 환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충실하게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돕던 큰 아들에게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큰 아들이 밭에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집에서 들려오는 풍악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종을 불러 알아보니 집을 나갔던 동생이 돌아 왔는데 이 일로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도무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안된다고 말해도 우겨 유산을 챙겨 달아난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어 주다니… 아버지 밑에서 뼈 빠지게 일한 자신을 위해서는 아버지가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준 적이 없는데… 분노까지 치밀었습니다.

이 소식이 아버지에게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에게 작은 아들의 문제가 해결되나 싶더니 이제 큰 아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래저래 근심입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고 근심을 끼치는 두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편하고 만족스럽게 해 드리지 못하고 아비의 근심이 된다는 면에서는 이 큰 아들도 탕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탕자라고 한다면 이 큰 아들은 집 안에 있었던 탕자인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이 이렇습니다.
28절 말씀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집을 나간 아들이 들어오니 집 안에 있던 아들이 들어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의 탕자일 가능성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두려움으로 경계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이 큰 아들처럼 집 안의 탕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큰 아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집안의 탕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큰 아들은 한 편으로 보면 너무나 충실한 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맡겨진 일에도 충실합니다. 25절을 보면 그날도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을 보면 이 탕자와 같거나 이 탕자의 수준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어떤 사람은 둘째 아들처럼 아예 노골적인 탕자입니다. 은혜를 받고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들은 전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아예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려 행하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부류는 근근이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위태위태합니다. 그러나 전혀 문제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항상 교회를 출석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일도 지키고 봉사의 일에도 참여합니다. 그래도 교회에서 행사를 한다고 하면 얼굴을 빼놓지 않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오늘 본문의 큰 아들과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큰 아들은 어떤 면에서 탕자입니까?

●아버지의 관심이 그에게는 무관심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관심거리에 대해 그는 철저하게 무관심하였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집을 나간 둘째 때문에 가슴을 앓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였습니다. 분명히 그는 아버지가 왜 동구 밖까지 매일 나가는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둘째를 생각하면서 내 쉬는 한숨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관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비유의 아버지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둘째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앞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가 모두 잃은 것에 대한 비유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은 잃은 자에 대한 관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간절하게 찾고 계십니다.
잃을 것을 찾고자 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잃은 양 비유에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4)- 아흔 아홉의 양을 들에 두고 한 마리 잃은 양 때문에?
잃은 드라크마 비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8)

정말 찾고자 하는 하나님의 간절함을 필설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의 관심을 외면하는 사람은 탕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집을 나가지 않았다고 탕자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집에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아버지의 심정을 알지 못하면 탕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장산2002 점프400비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꿈은 우리가 꿀 수 있지만 비전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간절한 비전, 우리 장산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그 비전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외면하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이 시대 탕자인지 모릅니다.
그런대로 신앙생활하고 헌금도 하고 적당하게 할 도리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큰 아들이 한 것에 비해 더 나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전도는 기도없이 이루어 질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대도 무슨 배짱인지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관심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뜻 때문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가 안되면 금요심야기도라도 나와야 합니다.

●집안 사람에 대한 무관심
저는 특히 오늘 본문이 자신의 동생에게 조차 무관심한 것을 보면서 우리도 동일한 상황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가족의 영혼에 대해 무관심 하다면 어찌 혈육의 정을 나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이 육신의 정을 그대로 가진 채 천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을 때 우리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 우리의 가족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혈육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롬 9: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과 같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잘 알고 있는 말씀이라도 어느 날에는 눈에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에게 나타난 그 단어는 27절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입니다. 아버지는 이 둘째 아들을 평소에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아들이 장사해서 성공하고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나 봅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이 녀석이 몸까지도 상해서 돌아오면 안되는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교회 마하나임 전도대가 전도한 사람들 중에서 저에게 심방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람들이 한결같이 병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회개하고 이전의믿음으로 회복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세월 어디다 보내고 이제 이런 모습으로 온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의 이웃이, 여러분의 전도 대상자가 다 깨어지고 부서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할 때 주님 앞으로 와서 후회의 삶으로 남은 일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것이 다 네 것
집안의 탕자는 아버지의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고 종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천국 열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고백하니 주님은 천국 열쇠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천국 열쇠를 가지고 주님의 창고를 열어 가져가는 것입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큰 아들의 불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동생은 제 몫을 챙겼는데 자신을 아직 챙기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몫이 돌아올 때는 아버지가 죽을 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산에 마음이 있는 이상 그는 불효를 담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이상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면 우리도 충분히 탕자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것이 자신의 것임을 모르면 의욕이 나지 않고 재미가 없습니다. 요사이 기업 중에 성과급으로 회사의 주식을 배당해 주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열심히 일하면 자신들에게 더 많은 이익이 배당되는 것을 아는 사원들이 더욱 열심히 일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여러분의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것과 여러분의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었을 때에 이미 자신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열어 놓았습니다.
쓴 것만큼 여러분의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이 있더라도 쓰지 않으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믿고 쓰시기 바랍니다.
예)아버지 해방 이후 창고 열쇠를 가지고 있다가 남에게 넘겨 준 일.

●풍족한 중에 핍절한 삶
큰 아들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큰 아들은 넉넉하고 풍족한 아버지 집에서 당당한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29절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그리고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심과 충성은 아들의 열심과 충성이 아니라 종의 열심과 충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기쁘고 즐겁게 일하면서 자신의 재산이 늘어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열심히 일하고 아버지 집은 부자 되고’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위해 염소 새끼 잔치라도 베푼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 스스로 잔치를 벌이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닐까요?
전도에 있어서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처음부터 우리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과 지혜로 전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 그 자체가 능력이니 그 도를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시작한 이 점프400의 비전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 새벽기도회 시에 계속적으로 나눈 말씀 이사야의 말씀 중에 전도의 비전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중에 가장 큰 힘이 되었던 말씀이 이 말씀이었습니다.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37:32)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구원을 이루실 때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열심을 믿고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금번에 또 하나님의 그 풍족하고 넉넉하심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각 개개인의 삶에서도 주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마음껏 사용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고에 쌀 가득하게 쌓아놓고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면 천하가 다 비웃을 일 아닙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집 안에 있을지라도 탕자입니다.

●맺으면서
저는 이미 금년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부어주신 은혜와 복에 감사하고 그것은 분에 넘치는 복이었습니다. 특히 전도로 잃은 하나님의 백성을 돌아오게 하는데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힘쓰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2개월이라는 기간이 금년에 남아 있는데 하나님이 남은 2개월도 채워주시겠다고 하시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어찌 제 한 사람의 복이겠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받는 복이요 은혜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감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은혜와 복의 주인공이 되나 보자!’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잃은 영혼에 대한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게 하십시다. 그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마음껏 사용하는 능력의 주인공이 되시고 그 증거도 얻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아 멘 -(주후200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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