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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동역자 브리스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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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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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실한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성경> 행18:1-4; 18-28
찬송> 349, 356장


사도행전은 말 그대로 사도들이 주님의 복음을 위해 행했던 기록입니다. 사도들 중에 특히 베드로와 바울의 활동이 주요 내용인데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역자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역자로 활동합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더욱 두드러지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던 12명의 제자 중에 포함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떤 제자보다도 많이 활동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곧 초대 교회 태동의 역사입니다. 이 교회 태동의 역사에 바울 사도가 직간접으로 개척한 교회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에 기록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바울 사도에 의해 개척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교회,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직접 전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또 골로새교회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교회는 바울의 직간접 영향 속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안디옥 교회는 바울이 바나바의 초청을 받아 함께 섬겼던 첫 번째 목회지입니다.
실제로 세상의 사상가들과 역사학자들이 평가하는 바로는 기독교 역사상 다른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역사적, 사상적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바울을 꼽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주님께 헌신된 한 사람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나 과연 바울 한 사람만으로 이 놀라운 역사가 가능했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조그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들고 아시아와 유럽을 다닐 때 하나님은 그가 가는 곳마다 신실한 동역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더베와 루스더라에 갔을 때 디모데를 만났고, 빌립보에서는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복음 사역에 의사 누가가 합류하였고 그 외에도 우리가 바울 서신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대부분 많은 사람의 안부를 전하고 묻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거의 다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역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함께 동역하였기에 바울의 복음 사역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또 한 사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나옵니다. 이 부부 역시 바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동역자였습니다. 오늘은 이 부부 동역자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바울의 관계를 여러 성도들과 저와의 관계에 접목시키려 합니다.

1. 먼저, 이 부부는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의 상황을 알아야합니다.

1)그는 영적으로 많이 지쳤습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 대적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가 지나는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는 끈질기게 죽이려고 추적해오는 사람들을 피해 베뢰아에서 다시 아덴(아테네)로 이동하고 다시 고린도에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도망치듯 쫓겨 다니면서 지내는 동안 바울은 많이 지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 그는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확고부동하지만 그는 많이 힘이 들고 지쳐있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습니다.

사명으로 일하지만 항상 똑 같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정말 의욕이 넘치고 하고자 하는 일에 소망이 있는가하면 어떤 때에는 너무 힘든 때가 있고 내가 왜 이 사명을 갖게 되었는가 후회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예1)모퉁이돌 선교회의 이삭 목사의 기도서신에서의 고백 - 북한 사역을 하면서 실제 목숨의 위기가 닥쳐올 때 연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솔질한 고백.
예2)엘리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갈멜산에서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자신만만하게 겁 없이 싸우던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까지 잘 감당해오던 바울도 고린도에서 낙심하게 됩니다. 바울과 같은 처지에서 낙심하게 되면 보통 사람보다는 더 심각한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낙심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의 칼이 목에 와 닿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그런 죽을 위험 속에서 사역을 해 왔었고, 그런 위험도 성령충만과 하나님의 동행을 느끼면서 극복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보다 더욱 위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2)재정적(금전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내려와서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는 생계의 문제를 혼자 해결하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니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장막을 치는 그의 직업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3)우리는 바울을 너무 신앙적인 관점에서 본 나머지 인간 이상으로 그를 생각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런 연약한 모습을 이야기하면 ‘그렇게 믿음이 좋은 바울이 그렇게 사람을 의지하고 또 금전적인 것에 영향을 받았을까?’하고 의문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답을 5절 말씀에서 풀 수 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이 말씀을 비추어 생각하면 이제까지 즉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기 전까지 바울은 실제로 유대인을 두려워했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후11:9에 실라와 디모데는 고린도로 내려올 때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 준 헌금도 가지고 내려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을 고백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바울은 후에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이 때의 일을 추억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바울도 역시 연약한 한 사람이었고, 또 어떻게 보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를 위로할 사람이 필요했고 또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런 가장 어려울 때에 함께 있어 준 사람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3절 말씀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바울은 고린도에서 생각지도 않는 한 부부를 만난 것입니다. 그 부부는 로마에 살다가 로마 황제의 유대인 추방 명령으로 고린도로 왔습니다. 바울과는 직업이 같기 때문에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신앙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 복음을 위해 함께 동역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바울의 형편을 알고는 아예 생활을 같이 하였습니다. 분명 수입을 서로 나누며 함께 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에게 있어 가장 어려울 때에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준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주어진 한 시대에 주의 복음을 위해 어떤 역할을 감당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에서 바울 사도보다 훨씬 더 연약한 저를 위해 위로자로 동역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었다면 저는 어떻겠습니까?

2. 둘째로 이 부부는 직접 복음의 현장을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들 부부에게 자신을 대신해 사역을 믿고 맡겼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의 합류로 1년 6개월을 고린도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로 음란과 퇴폐 문화가 만연한 곳이었는데 이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은 에베소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이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함께 동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21절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또 다시 에베소를 떠납니다. 그때 바울은 에베소에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두고 떠납니다.
바울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이 부부는 열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에 다시 에베소로 오게 됩니다. 그때까지 이 부부는 여전히 복음을 위해 사역하고 있었고 또 귀하게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고전16:19에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어 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한 번 헌신하면 변치 않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물질을 드려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믿고 맡겼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들이 바울에게서 항상 은혜만 받고 또 좋은 것만 보았을 까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멀리서 볼 때 귀하고 좋고 아름답게 보이지 가까이서 보면 찌꺼기가 다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부부 역시 바울의 인간적인 면을 다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모난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과 다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가 ‘이것이 진리다’ 생각되면 양보하지 않는 진리사수에 대한 곧은 면이 있었지만 때로는 이런 그의 면모는 지나칠 정도여서 많은 사람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한번은 바울이 안디옥에 갔을 때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다가 야고보의 일행이 오는 것을 보고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울은 베드로를 외식주의자라고 비방하였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면서 복음의 정신에 이렇게위배되는 일을 해도 됩니까? 당신 때문에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되었으요”
감히 그 당시에 누가 베드로를 이렇게 책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첫 번째 전도여행 때에 바울은 바나바와 한 팀을 이루어 전도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따라갔던 마가 요한이라는 사람은 전도여행에 어렵움이 닥치자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 이 마가 요한 때문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절대 전도팀에 동참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고 바나바는 다시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바나바 때문에 크게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사도들(기독교 지도자 사회) 사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바나바가 고향 다소에 은둔해 있던 바울을 천거해 안디옥 교회의 사역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인정적으로도 바나바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이 마가 요한의 문제로 두 사람은 결별하고 각자 다른 사람과 함께 전도팀을 이루어 떠나게 되었습니다.(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떠난다.)
바울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거절하고 외면해 버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면서 바울의 이런 모습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도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마음 상하는 일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충성하였습니다.

요사이는 감정이 상하고 나면 신앙이 뿌리가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해합니다. 감정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분, 감정이 우리의 본질적인 신앙을 좀 먹지 않도록 제어하는 힘이 있어야합니다. 기분 좋을 때 섬기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은 기분이 나빠도, 마음이 상해도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 부부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섬김을 돌아보십시다.

3. 셋째로, 이들은 복음의 진리에 확실하게 무장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준비되었기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를 함께 건너간 이 부부는 바울이 처음 파송을 받았던 안디옥으로 떠나자 그들 부부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에베소에 학문이 깊고 성경에 능통한 한 학자가 북아프리카 지역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와서 설교하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볼로’였습니다.
그들은 아볼로가 가르치는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과연 그의 성경에 대한 박식함은 대단하였고 열심도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빠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아볼로를 데려와서 하나님의 도, 즉 복음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26)
이후에 아볼로는 고린도로 가서 사역하게 되는데 이전보다 더 큰 유익을 성도에게 주는 사람이 되었다고 27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그의 박식한 성경의 지식이 이제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되었고 본래 웅변에 능한 사람이었기에 유대인들을 말로써도 이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볼로가 후에 고린도 교회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는지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파가 생길 정도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볼로가 제대로 사역하기까지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사람은 바로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부부가 신학자와 같은 사람도 가르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복음에 확정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지식은 아볼로보다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핵심만큼은 분명하게 확정하고 그 토대에서 삶을 사는 은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설교하는 것 한 번만 들어도 복음적인지 아닌지를 척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부부는 아볼로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따로 불러 말하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만일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설교는 비복음적인 설교요’라고 지적했다면 과연 아볼로가 받아들였을까요? 그러나 이 부부는 26절 말씀대로 ‘데려다가’ 이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부부가 얼마나 지혜롭고 경우가 있는 부부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신앙생활의 성숙이란 무조건 뜨거운 것이 아닙니다. 성숙된 신자는 지혜로운 신자이며 경우을 분명히 아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복음에 확정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학자처럼 성경에 능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만은 분명하게 꽤뚫고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많은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바로 이 사실의 토대 위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이렇게 잘 준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 마지막으로 이 부부에 관해서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롬16:3-4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여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다시 로마로 돌아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집을 교회로 제공하였습니다.(롬16:5 “저의 교회”)

이들 부부를 로마교회에 바울이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나의 동역자이다.
2)나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은 사람이다.
3)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동역하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복입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을 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자신과 같이 모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 수용하고 함께 동역해 줄 뿐만 아니라 위급할 때는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사람!
이들이 있기에 바울은 복음과 성도를 위해 더욱 더 자신들 드릴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 이런 성도를 기다리는 것은 목회자의 과한 욕심입니까?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부부는 바울의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한 목회자의 목회에서 복된 모습으로 항상 기억되어 그들이 축복할 때에 축복에서 빠지지 않는 성도, 이와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 (주후 200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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