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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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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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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성경> 눅12:13-21
찬송> 444, 453장

●들어가면서- 영국 신문의 돈에 대한 정의
영국의 한 신문사가 '돈의 정의를 바로 내리는 사람에게 1천 파운드를 주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경제학자, 윤리학자, 신학자들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이 응모하였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좋은 답을 제출한 사람으로 선정된 사람은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이었습니다. 그가 내린 정의는 이렇습니다.
'돈이란, 천국 말고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권이다. 돈이란, 행복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갖다주는 공급원이다.'
왜 이 소년이 이러한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문을 배달하다보니까 부잣집도 보았고, 가난한 집도 다 보았습니다. 보고 느낀 바대로 쓴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부자다, 가난하다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묻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장 나의 주머니가 비면 우리는 오늘 하루 고통을 겪어야합니다.

저에게는 이모님이 여러 명 있습니다. 어머니 형제가 9남매입니다. 그것도 어릴 때 두 사람이 죽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중에 제일 작은 이모님은 결혼을 해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이모부님이 암으로 일찍 죽었습니다. 2남 1녀의 자식과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으니 그 인생이 심히 고달팠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모님이 그때 저를 말리면서 "정우야, 그래도 돈이 있어야 산다. 잘 생각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말은 돈 때문에 흘렸던 눈물의 세월이 참으로 고달팠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물질 세계에 삽니다. 그것이 얼마냐에 따라 가치가 판단되고 결정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돈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돈을 우리는 보아야 하겠습니까?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그의 저서 '행복론'에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4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명랑한 정서가 있어야 한답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밝게 볼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는 정서를 말합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몸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크게 건강을 잃어 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건강을 잃으면 돈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셋째는 정서적 평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만족을 아는 정신적 자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약간의 외부 자산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행복의 조건으로 돈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산이라고 할 때에는 세 종류의 돈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당연히 필요한 재산. 즉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여유 있는 재산. 셋째는 불필요한 재산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부자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불필요한 재산이 너무 많았습니다.

●부자와 나
여러분 가운데 오늘 '나는 이 부자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부자도 아닐뿐더러 나는 불필요한 재산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더 더욱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재산 때문에 고민 좀 해봤으면 좋겠다' 이것이 혹시 여러분의 마음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그것은 여러분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 부자처럼 돈 쌓아 놓고 둘 곳이 없어 고민하는 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항상 부족하고 없어 탈이지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부자의 상황과 우리의 현 상황은 다르지만 물질관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즉 물질에 집착하는 우리의 마음은 부자나 우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부자와 같이 외치며 살아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17)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8)

"내가 돈이 많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땅이나 좀 사두자. 집이나 좀 사두자." 이 말 아닙니까?
"돈이 행복이 아닙니다. 돈이 있기 때문에 더욱 불행한 사람이 많습니다".라고 말하니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죽어도 좋으니 돈 밑에 깔려 죽어봤으면 좋겠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완전히 성화되지 못한 우리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갖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되 세상에는 세상의 법칙보다 더 우선한 하나님의 법칙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면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칙을 따를 때 우리는 물질 때문에 고통스런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물질에 대해, 돈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하면 절대 돈에게 주인 노릇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물질에 대해 바른 그릇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주시고 싶어도 담을 수 없습니다. 돈이 우리에게로 왔다가 담기지 못할 곳인 줄 알고 달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곡간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곡간이 필요하도록 물질이 주어질 수 있는, 맡겨도 실족하지 않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줘서 손해 볼 사람에게 왜 주시려 하겠습니까? 줘서 돈과 함께 망할 사람에게 하나님이 왜 주시겠습니까?

물질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본문에 있는 대로 보십시다.

● 탐심을 물리쳐라
첫째,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15) 탐심이란 말뜻 그대로 '탐내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탐내는 마음인가? 그것은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또 질문이 생깁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것의 답을 주기도문에서 찾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해야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 구할 때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바른 자세를 가지지 못하면 탐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한다면 계획도 없이 살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계획은 하십시오. 그런데 그 계획이 나의 탐심에서 나온 계획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탐심을 물리치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의 쓸 것이 아니라 내일, 내달, 내년의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어렵다 힘들다'하면서도 다들 이제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탐심의 근원은 대부분 지족(知足)하지 못하는데서, 즉 족한 줄 알지 못한데서 옵니다. 딤전6:6에는 지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의 경건도 유익되다고 말합니다. 즉 이말은 우리가 탐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해도 만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어떤 선교사님이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견디다 못해 불평을 쏟아 놓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창 밖에서까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더욱 짜증나게 했습니다. 무엇을 하느라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애들을 내쫓을 양으로 창가로 갔다가 그만 아이들이 노는 밝고 천진한 모습에 마음이 녹았습니다. 그런데 곧 얼마 안 있어 이 선교사는 하나님께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재미있게 노는가 보았더니 조금 전에 자신이 먹은 통조림의 깡통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자주 선교사의 집 문 앞에 있는 쓰레기통을 뒤져 혹시나 남은 음식이 있나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음식이 남아있지 않고 빈깡통이 나오면 불평하지 않고 그 깡통을 가지고 또 천진하게 노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원주민들이 먹을 수 없는 고급 통조림으로 식사를 하였지만 전혀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 아이들은 자신이 남겨 버린 음식만으로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누가 더 행복한 자이며 지금 누가 누구에게 선교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불평, 불만은 다 저 사람보다 내가 못하다는 비교의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교 의식을 가지고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이 없습니다.(다른 사람 집 빨래줄에 널린 수건까지 참 좋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 사람을 바라보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12:2)

● 자기만을 위해?
둘째, 자기만을 위해 즐겨서는 안 됩니다.(19)
부자는 조금씩 늘어가는 그의 곡식을 두고 끝까지 자신만을 생각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에게 줄 생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앞서 행복의 조건에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기본적을 필요한 재산, 둘째는 여유가 있는 재산, 셋째는 불필요한 재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난 뒤의 남는 재산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엡4:28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눅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구제는 하늘 주머니에 저축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여 우리가 소득을 얻게 되는 것은 모두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세금도 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몫만을 챙겨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깁니다. 다 내가 잘 해서 된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더 수고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수고한 것 이상은 취하지 말고 그들에게도 이익을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민이 생깁니다. 우리가 얼마나 헌금을 하고 구제하면 우리는 우리의 소득에 대해 자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이 원리입니다.(김동호 목사의 견해)

그것은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추수에 관한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할 때 자기 밭이라고 네 귀퉁이까지 다 추수하여서는 안 된다는 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네 귀퉁이 남겨 놓고 추수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추수하다가 단을 떨어트리거든 줍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사람이 주어 갈 수 있도록 버려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제2의 십일조라고 불리우던 것이 있었습니다. 삼 년에 한 번 더 십일조를 하여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삼 년에 십분의 일은 1/30조에 해당하고 그것은 한 달 수입에 하루 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일조와 제2의 십일조 그리고 추수할 때 네 귀퉁이를 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작지도 쉽지도 않은 액수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엄청난 액수입니다.
제 계산이 정확하지 모르겠으나 제 계산에 의하면 그것은 최소한 31.7%에서 34.9%였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소득 가운데 3/10은 헌금, 또는 구제등으로 사용한다면, 그 나머지 돈에 대해서는 우리가 타락과 범죄를 위해 쓰는 돈이 아니라면 무엇에 써든 자유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제는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써든 그리고 얼마를 써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쓸 만큼의 수고를 한 사람이며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계획
돈에 대한 나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자는 물질에 대한 자기의 계획을 구상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우습게 보시고 그의 계획을 수포로 만드셨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곡간을 더 넓힐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 영혼을 오늘밤에 데려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부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물질을 풍성하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의 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는 할 수 없이 곡간을 헐고 더 큰 곡간을 지어야했을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이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부어주시니까요?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쓰기 전에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쓰기 전에 얼마나 인간적인 계획은 많은지요.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우리의 돈 쓸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분명한 돈이 됩니다.

약4:15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원대한 꿈을 가지시는 분들이 나오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부터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준비하시면 분명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몇 일전에 저의 둘째형님과 형수가 집을 이사했다고 어머니를 모시고 저의 집을 다녀갔습니다. 형은 인천의 우리 교단의 한 교회의 섬기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우리 교회와 규모가 엇비슷한 교회입니다.
형님과의 대화 중에 생각지 않는 말을 듣고 제가 우리 형님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본인이 교회에 한 헌금이 5천만원 정도 되는데 금년 목표 1억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생각했겠습니까? '형을 우리 교회 출석 시켜야겠구나' 아니요. 저는 친인척이 와서 함께 도우는 것을 그렇게 원치 않습니다.
'우리 형 생각보다 멋지고, 신앙이 좋네!'하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형은 조그만 소기업체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향료사업)
형이 섬기는 교회 목사님께 잘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목사인 동생으로서 참 감사했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형의 신앙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금번에 이 이야기를 듣고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체험적인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작년 5천만원 헌금했다가 금년에 그 배를 해야겠다. 이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작년에도 사실은 분에 넘치게(제가 볼 때는 자신의 믿음 이상으로) 헌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1억을 하겠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가슴에 두고 하는 믿음의 행위에 재미를 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써라고 복 주시지만 그러면 거기에서 떨어지는 콩고물도 있지 않겠습니까? 집도 보니 제가 볼 때 그만하면 됐는데 또 더 부모님을 위해 더 넓은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해야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청년들도 이런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이랜드 박성수 사장)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20)
즉,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 나의 부르시면 하나님 앞에 서야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계획을 가지고 있는 부자의 영혼을 오늘밤에 당장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죽음이 멀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죽음은 항상 우리 바로 곁에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쥐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죽을 때는 모두가 다 손을 펴고 갑니다.
욥의 고백이 맞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딤전6:17에 이 세대의 부자들에게 말씀하면서 "정함이 없는 재물을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정함이 없다는 말은 일정하게 머물러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돈이라는 것은 돌고 돈다고 하여 돈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정함이 없는 돈을 나에게 머물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부자였지만 물질에 마음을 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러기에 졸지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범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후에는 이전보다 두 배로 받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지금 당장이라도 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정말 헛된 재물에 내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예)불교 신자들 가운데 자신의 재산을 기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기도교인들은 적은 것 같습니다. 왜 생명의 종교가 이런 것에서 더 확실한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있을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위하고자 내린 해석이 불교 신자들은 움켜쥐고 있다가 죽을 때 바치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평소에 바치기 때문에 바칠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생각을 고치십시오. 그것으로 몫 돈이 들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을 향해 부요해지는 사람.
결론적으로 이렇게 사는 사람의 삶을 가리켜 하나님께 부요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부요로와지고 싶은 생각을 가집니다만 그것은 비참해지는 길입니다. 그것은 밑이 없는 끝없는 욕망에 자신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이 곧 나 자신에 대해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요하여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역사로 더욱 부요해지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주후200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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