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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산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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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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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산 소망
성경> 고전15:12-20
찬송> 154, 159장

●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기독교를 타종교와 비교할 때 다른 점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바로 부활입니다. 이 말은 또 기독교의 핵심이 부활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절은 기독교의 다른 어떤 절기보다 더 의미있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절도 의미있는 날이지만, 오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구원을 완성하신 이 부활절은 더욱 의미있는 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에 이 본질적인 내용인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여타 다른 종교나 미신을 섬기는 자들의 신앙과 다를 바 없게 보일 것입니다. 아니 부활이 없으면 다른 종교들이 훨씬 더 휼륭해 보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성도가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전도를 하면서 자기네 교회 목사님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이 불교 신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교회 목사님이 아무리 훌륭해도 부처님만큼이나 훌륭하겠나? 이제 그만 좀 해라"

여러분 주위에도 절에 나가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 여기에는 이전에 절에 열심히 다니시다가 교회에 나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불상 앞에 열심히 합장을 했는데 이제 그 손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손으로 바뀐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부처님과 저를 비교할 때 누가 더 낫습니까? 섭섭해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그것 물어본들 무엇하겠습니까? 답이 뻔한 걸요!

저는 부처님 아니라 그 보살님이 다니는 절의 지주보다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의 불교승려 가운데 그 인격이 얼마나 고매한 분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불교의 우상처럼 되어버린 고 성철 스님, 또 많은 글들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진 법정 스님, 또 외국인 승려로서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주인공 현각 스님. 이런 분들의 인격과 성품은 분명 일반 사람들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부활을 이야기할 때는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좀 더 착하게 살자. 양심적으로 살자. 인간답게 살자.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한 베푸는 삶을 살자"
이렇게 말하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거의 같아집니다.

이런 말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석가나 공자도 다 똑같이 말하고 권합니다. 이런 것만을 강조한다면 굳이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를 믿기보다는 우리 문화에 더 뿌리를 내린 불교나 유교가 더욱 우리의 정서에 맞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석가나 공자가 감히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요11:25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석가나 공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이야기는 해 주었지만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부활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며 부활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예수님과 삶의 목적이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비슷한 이상을 가지고 산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결과가 그것을 나타내 줍니다.
이들은 다 죽음으로 그들의 생애를 끝내버렸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다른 성인들과 다른 점이며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인생들을 위해 중보하시며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무엇을 믿기 위해 생긴 것입니다. 여타 다른 종교의 신앙과 기독교가 다른 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 한가운데 이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 부활의 증거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그렇게 독특한 부활의 종교라면 그렇게 우기지만 말고 증명을 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아쉽게도 이 부활이라는 문제는 증명할 논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증명해 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입증해보라는 말인데,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과학 수준을 초월하여 역사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한 일이라면 우리가 이해가 가능해야 하겠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한다면 그 하나님의 수준은 우리의 수준과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해되지 않으니 감사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덮어놓고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궁극적으로 이런 신앙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증명을 해 보일 수는 없지만 증거는 있습니다. 어떤 증거입니까?
1)빈 무덤이 증거합니다.
무덤 속에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시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에는 시신이 없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에 대한 전통적인 반대설들 - 환상설, 도적설, 기절설…)

2)증인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부활하신 모습을 목격한 자들이 무려 500명 이상이나 된다고 기록을 합니다.(고전15:5-8)

3)제자들의 태도의 변화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이제는 끝났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고 지금까지 우리는 헛수고했다."하여 저들은 터벅터벅 자기들의 갈 길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훗날 저들은 모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 진 것입니까?

도마 같은 경우는 다른 동료들이 예수님 부활했다고 말하니까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냐고 하면서 도무지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가 훗날 인도에 가서 복음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순교했고 안드레도 순교했고 바울도 순교했고 하여간 제자들 모두가 순교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 역시 순교의 각오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느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각을 그리고 그들의 삶을 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일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될 수 있으며 편하게, 될 수 있으면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모두 예수에게 생명을 걸고 예수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어떤 바보가 거짓 사실에 목숨을 겁니까? 있지도 않은 사실을 증거하다가 순교합니까?

베드로는 예수 부활했다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다가 공회에 잡혀갔습니다.
심문을 받습니다. 매를 맞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이러한 요청을 받습니다.
"너희들 다시는 예수 부활했다는 사실을 전파하지 말아라"
이 때 베드로가 당당하게 저들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고 들은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
예수의 부활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인데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으며 사실인데 어찌 전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거짓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증거한 것이요 거짓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니라 사실에 목숨을 건 것이었습니다.


●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의미
그러면 이렇게 위대한 지상 최대, 최고의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준 의미를 잘 깨달아 부활의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이 고난을 받고 부활하신 것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말씀 '겟세마네의 고뇌'라는 제목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고뇌는 사망을 바로 앞에 둔 고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망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망이 무엇입니까?
왜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공포로 다가옵니까? 그것은 사망이 저주와 징벌을 동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망의 징벌은 요한 계시록에는 '남김없이 부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계14:10) 그것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입니다. 그 곳은 사람이 불로써 소금 치듯 취급을 당하는 곳입니다.(막9:49)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 품의 거지였던 나사로를 부러워하며 나사로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케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사망이 무서운 것은 사망은 저주 속에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고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지 이것을 위해 모든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님 마저도 사망의 직전에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사망의 저주와 고통을 철저히 받으셨고 죽으셨다가 삼 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써 사망의 권세는 무력화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사단은 이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인생들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사단의 무기인 사망을 무장해제 시켜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값으로 사망에 직면했던 모든 인생이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던 순간에도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2.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 사실 역시 기독교가 타종교와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다 인간입니다. 그들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인간으로서 죽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연약한 '인간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이들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근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단지 마리아라는 한 처녀를 인간의 몸을 입는 도구로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빌2:6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합니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이스라엘의 나사렛 지역에 사셨던 그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의 하나님 되심의 증거들이 성경에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그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인생으로서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그의 근본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롬1:4)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기독교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간이 궁리하여 만들어 낸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종교인 것을 확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기독교는 또 한번 구별된 종교인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합니다.
오늘 본문 고전15:20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과실수든지 첫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 이어 다음 열매가 맺히고 이어서 줄줄이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제 후로는 부활하게 될 사람들이 이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이어서 부활하게 될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다음 열매의 대상은 '그에게 붙은 자'입니다.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 다음 열매가 맺는다고 합니까?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입니다.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해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가 믿을 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그가 부활하실 때 함께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사실 문자적으로 부활한다고 말할 때, 믿는 우리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활합니다. 다시 말해 믿든지 안 믿든지 모두가 다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활을 해도 무엇 때문에 부활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죄수가 철장을 열고 나와도 사면을 받기 위해 나오기도 하지만 사형을 당하기 위해 나오기도 합니다.
(요5:29)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만이 주님과 함께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앞서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은 후 삼일만에 살아날 것을 말해 주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큰 충격이었고 그들은 곧 절망과 낙담 속에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 때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호령하리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소극적이던 그들의 삶이 변하여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의 핵심은 부활이었습니다. 결국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 23:6)고 외쳤습니다.

왜 겁 많던 제자들이 능력의 사람들로, 사울이 바울로 변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그들에게는 더 좋은 부활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우리의 믿음의 선진 중에는 악형을 받을 때도 더 좋은 부활을 생각하고 구차히 그 형을 면하려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히11:35)

성도 여러분, 목숨을 떼 놓고 덤비는 사람만큼 겁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영생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목숨에 궁극적으로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을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히11)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부활은 낙심과 좌절과 슬픔을 물리치고 기쁨과 소망을 줍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였던 D.L. 무디는 젊었을 때 장래식 설교를 부탁 받고, 예수님은 장례식에서 어떤 설교를 했는지 궁금하여 성경을 다 찾아봤는데 장례식장에 예수님이 가기만 하면 그만 장례식장이 잔칫집으로 변하고 만 것을 알았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고질적인 죽음과 사망의 문제는 예수님 앞에서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화) 전직 불교 승려이면서도 개종하여 목사가 된 김성화 목사의 간증 중:
그가 성경을 읽는 중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이적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경에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때 석가모니가 준 교훈과 예수님이 준 교훈이 많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과부 집에 독자가 죽었습니다. 얼마나 큰 슬픔이 찾아온 것입니까? 석가모니에게 한 제가가 이 집의 슬픔을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없겠느냐고 찾아왔습니다. 그때 석가는 마을에 내려가서 한 번도 죽음을 맛보지 않은 집에 가서 쌀 한 섬을 모아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그 사람은 소망을 가지고 동네에 내려가서 죽음을 보지 않은 집의 쌀을 구하러 온 동네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한 톨의 쌀도 구하지 못하고 다시 석가에게 왔습니다. 그때 석가는 "생로병사는 중생에게 준 업인데 나인들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상여를 멈추게 하시고는 "청년아 일어나라"하고 명하셨고 청년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김성화씨는 큰 충격을 받고 개종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됩니다. 불교는 체념의 종교이며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 부활의 산 소망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현실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와 함께 부활에 동참할 것이 예약된 자들이 아닙니까!
큰 것을 목적하는 자들은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로 인생의 가장 큰 적인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린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화)딸과 남편을 먼저 천국으로 보낸 조영주 집사의 간증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회보가 저에게 왔습니다. 거기에 한 집사님의 간증이 실려 있었는데 그 집사님의 글 내용은 제가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기에 깊이 공감을 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동의대 교수를 하던 집사님과 그의 부인 딸과 아들 이렇게 네 식구가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생각지도 않은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곱게 잘 컸던 딸이 희귀한 병에 걸려 27세 꽃다운 나이로 천국에 갔습니다. 서울 삼성병원에서 제가 마지막 기도하고 임종하였습니다. 그 시신을 부산으로 운구하는 차에 그의 아버지 집사님과 아들과 제가 타고 왔습니다. 그의 부모가 충격이 컸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내색을 하지 않고 교회에 더 충성 봉사를 하였습니다. 당시에 교회에 장애인들을 가르치는 소망부가 생기고 이 소망부의 부장을 맡아 고통 속에 있었던 딸을 보살피듯 정말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딸이 죽은지 거의 1년에 되는 날, 또 저의 집에 이 집사님이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전화와서 제가 급하게 뛰어가 119구급차에 실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약2년의 투병 생활 중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걱정한 것은 병중에 있던 딸이나 남편 집사님이 아니라 부인 집사님이었습니다. 이제 남편 마저 죽었으니 어떻게 감당하겠는가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집사님은 이렇게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윤집사는 분명히 성도들의 사랑을 알고 고마워하면서 천국에 갔을 것입니다. 남은 가족들도 교회에 마음놓고 맡겼을 겁니다. 그리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던 그 누구도 만났겠지요. 지금쯤은 그저 평안히 이곳에 있을 때처럼 하나님 품에 안겨 안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시작만 해 놓고 마무리 짓지 못한 소망부의 눈부신 발전도 내려다보고 빙긋이 미소를 짓고 있겠지요. 수고하시는 목사님과 선생님들께 무척 고마워하면서 말입니다. 새벽기도 길을 오가며 즐거이 흥얼거리던 찬송가도 계속 부르고 있겠지요? 무엇보다 저희 가족들이(특히 제가) 다시 교회생활을 시작하고 또 열심히 주안에서 살다가 다음에 천국에서 기쁘게 다시 만날 그 날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시는 교회를 그가 감히 하나님께 자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집사님이 부활의 산 소망이 없다면 어찌 일어설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는 부활신앙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아 멘 -
(주후 2002. 3. 31.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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