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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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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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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겟세마네의 고뇌
성경> 마26:36-46
찬송> 141, 144장


● 고난주간 중 가장 심각했던 겟세마네
오늘 고난주간의 시작일인 종려주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시대로 돌아간다면 예수님은 오늘 뭇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는 내일부터 본격적인 고난의 한 주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고난주간의 절정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념하여 금요일에 모여 수난기념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기도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은 겟세마네에서 결정이 났습니다. 그 결론에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적인 고통은 십자가에서보다 겟세마네에서 더 심각하였는지 모릅니다. 즉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승리하지 하지 못하셨다면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고난의 길에 내어주기 전에 먼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셔야 했습니다. 이 영적 전투는 철저하게 나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 영적 전투의 현장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에 찬 주님을 봅니다. 이 동산에서의 고통은 앞으로 있을 고통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하셨던 고뇌의 심각함을 생각해 보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담당하신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겟세마네! 이 곳은 예수님의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곳은 감람산의 어떤 한 야산이었을 것입니다. 눅22:39에는 예수님이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아 예수님은 자주 이곳을 찾으셨고, 이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도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였다고 했는데 역시 이 겟세마네 동산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필요할 때마다 이 장소를 찾아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있어 이 겟세마네는 공생애 사역 중에 사람들에게 시달린 심신을 하나님 앞에서 위로 받는 장소요, 사역을 방해하는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대항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는 장소요, 더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긴밀히 교제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겟세마네는 위로의 장소요, 능력의 장소요, 평강의 장소요, 소망과 기쁨의 장소였습니다.

● 심각한 고뇌의 현장 겟세마네
우리는 보통 이 본문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사건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라고 하지 전투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기도는 그냥 기도라고 말하기보다는 분명 전투와도 같이 보여집니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는 이전에 예수님이 했던 기도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영적인 전투였습니다.
그 영적 전투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39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인지 아버지의 원인지. 즉 나의 뜻인지 아버지의 뜻인지. 나의 뜻이 이기는지 아버지의 뜻이 이기는지에 대한 전투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나의 뜻은 이 고난의 잔을 예수님이 마시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이 잔을 남김없이 받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전에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좇았지 자신의 뜻을 좇지 않았습니다.
요5:17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고 요8:29에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는 무엇인가 너무 큰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지닌 현재의 문제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37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 자리로 나올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생이 가진 고통을 친히 체휼하셔서 그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까지 그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 평안과 기쁨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진 평안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요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리고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었습니다.(마11:29) 그러므로 그는 그의 사역으로 항상 바쁜 가운데서도 영혼의 평안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의 평안은 사라졌습니다. 그의 평온함은 폭풍으로 변했습니다. 성만찬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셨지만 그러나 겟세마네에서는 찬송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일생동안 여러분은 예수님이 자신의 슬픔을 표현한 것을 한 번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겟세마네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26:38)고 제자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자신의 슬픔을 감출 수가 없었고, 또 감출만한 여유조차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다가 세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찾아가셨고 자신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통스런 마음을 알리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어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

그는 지금 이 기도를 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얼마나 심각하며 얼마나 처절한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슬픔은 피 같은 땀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한숨과 신음이었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의 신음과도 같은 주님의 그 기도소리를 듣는다면 끔찍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다 주님은 통곡하셨습니다. 히5:7에는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곳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신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겟세마네는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고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놓을 수 없다며 처절하게 부르짖은 얍복 나루보다 더 처절한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 겟세마네의 고뇌를 생각하는 우리의 자세
그러면 이제 이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고뇌는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모두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솔직히 시인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똑 같은 형제 자매의 고통조차도 깊이 공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말할 때 조심스럽게, 신중히,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평범한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그 고통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깊이 있게 느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으로만 생각하는 경향들을 조심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 그것이 의미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신적 고난은 그가 왕으로서 마땅히 받아야할 대우를 생각할 때,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아야할 대우를 생각할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겟세마네에서 고통스러워하시고 고민하신 것은 앞으로 있을 육체적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이 고통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의 바쁜 사역, 그렇게 피곤하신 중에도 육신적 고단함으로 불평하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앞으로 받을 비난 때문에 두려워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그 당시 그를 미워하는 자들의 비난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러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엇이 그토록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한 것입니까?

●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함
첫째로, 예수님이 받으실 십자가의 잔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잔은 유대인으로부터도 아니고, 반역자 유다로부터도 아니며, 마귀로부터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채워진 잔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부모로부터 버림을 당해 본 적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제 친구 중에 하나는 그의 어머니가 형제들을 버리고 도망가버렸습니다. 물론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을 버리고 간 어머니를 그는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날이 되면 그는 더욱 괴로워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은 항상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가 이 고통 속에서 해방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러나 예수님의 버림당함은 단순히 부모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단의 교활한 시험은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고난의 잔이 그의 가장 사랑하는 분이신 아버지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사53:10에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사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전에 우리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께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예수께 그의 아버지로서 사랑을 베푸셨고, 그와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버릴 것은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무리가 많고 제자들 마저 죽는 데까지 따라 가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근본 속성을 아셨기에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요 2:24)
그러나 성부 하나님은 달랐습니다. 그는 성부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 계심을 알았고 그것을 위로와 능력으로 삼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떠나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오직 성부만이 계시면 되었습니다.
요8:29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요16:32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바로 그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기로 하고 고난의 잔을 마셔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함께 하셔야할 아버지, 그것 때문에 기쁨이었고 소망이었고 능력이었던 바로 그 분이 자신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얼굴을 돌리시더니 자식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바로 이 사실을 가장 가까이,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국 이 버림받는 고통의 시간에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가장 믿었던 분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고통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절규는 도저히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서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그 고통을 우리가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죄인으로 낙인 찍힘
둘째로 그의 겟세마네의 심각한 고뇌는 죄와 무관하신 분이 인간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
우리는 이 말을 자주 듣고 또 고백하며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말하는 만큼, 믿는 만큼, 그 말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이 말 뜻을 정확하게 안다면 우리는 이 말을 할 때마다 우리의 가슴을 찢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입니다. 그 분이 죄가 없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자가 죄인을 대신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요일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 죄가 없으신 분이기에 그에게 죄를 덮어씌운다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한 번 범죄한 사람은 다음 범죄에 더 대담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 죄짓는 사람에게는 첫 범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고후5:21)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벧전1:19)이라고 했습니다.
죄와 전혀 상관이 없으신 분,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 죄와는 전혀 어울릴 수 없으신 분에게 인간의 죄가 씌워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여러분은 맑디맑은 청정 해역에 유조선이 침몰해 기름 띠가 번져갈 때 안타까울 것입니다. 죄와 상관없는 분에게 죄인이라는 큰 낙인이 찍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죄사함을 선포하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 달린 사람은 죄인일 뿐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에서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 제 1언을 전하다가 묵상 중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전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신 분입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자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런데 십자가에서 주님은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인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의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며 말하였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2)
이 비난하는 자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죄인일 뿐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 스스로 이 땅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자신이 알고 온 바로 그 일의 실체 앞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처음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는 현장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인류 모든 죄를 말입니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퍼져나간 모든 인간의 죄를 총망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순결하디 순결한 소녀에게 흉악한 죄수가 덤벼드는 것 이상으로 끔직한 일입니다.

● 죄인에게 내려진 징벌을 봄
셋째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인이 받을 징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사람이 극한 공포 앞에서 발악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지옥 형벌이란 막연한 것일 겁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지옥의 끔직한 현장을 보게 됩니다.

서울 구치소에 교도관으로 있는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을 들어보면, 사형수들이 마지막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혼이 빠져나간 상태와 같다고 합니다. 그들을 극한 공포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지에 오줌을 싸는가하면 또 마지막 확인 심문에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한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서 계신 것입니까?
지금 그는 요단강 건너편에서 천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죄의 값인 사망의 고통의 현장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 고통의 진노의 잔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요한은 계14:10-11에 죄인이 받아야할 지옥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바로 이 지옥의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것입니다.
시116:3에 다윗은 자신이 당한 고통을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라고 말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지옥 간 부자는 천국의 아브라함에게 요청하기를 "천국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피 같은 땀을 흘리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식은 땀은 허약한 육체에서 나오지만 피 같은 땀은 영혼의 허약함과 좌절에서 나온다"

주님의 겟세마네에서 죄의 값인 사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심
예수님은 이 고뇌 속에서, 즉 영적인 전투에서 결국은 싸워 이기셨습니다.
45-46절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이제는 더 이상 기도가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풀었다는 말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앞으로의 실제 고난의 길을 당당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이런 심각한 고통 속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이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아 멘 - (주후20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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