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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골 골짜기
  • 날짜 : 2006.9.10
  • 본문 : 여호수아 7:16-26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아골 골짜기

성경> 수7:16-26

찬송> 16, 219, 334



●들어가면서 - 아골 골짜기

지난 주일에는 여리고 전투 명령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는 제시된 하나님의 명령에(사실 그 명령이 상식적이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행함으로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하루 한 바퀴씩 엿새를 돌고, 마지막 칠일 째는 그 성을 일곱 번 돌고 난 뒤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것을 시작으로 백성들은 크게 외쳤을 때 여리고 성벽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리고 는 성문을 굳게 닫았지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성이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로 진입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칼로 쳐 죽이고 성읍은 불태웠고 은금동철은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습니다.



여리고를 정복한 이상 가나안의 정복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지도참고) 이스라엘이 그 다음으로 지나야 할 길에 ‘아이’라는 성이 있었습니다. 이 성으로 정탐꾼을 보내보니 그 성은 여리고에 비하여 별 보잘것없는 초라한 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병력을 다 동원시키지 않고 삼천 명만 선발하여 아이 성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36명의 병력이 전사했고 아이 성의 군사들은 이스라엘 진영의 더 가까이에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분명 아이 성의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것이고 역시 죽기를 각오하고 진영을 더욱 이스라엘 가까이에 세워놓았을 것입니다.(이들은 황산벌에서 신라군들과 일전을 벌이는 계백장군의 군사들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7:5에는 이 결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이, 6-9절에는 이스라엘의 여호수아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5:1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여리고 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내렸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여호수아는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한 나절 동안 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 있다가 날이 저물자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전쟁에서 불과 서른여섯 명이 죽은 것을 두고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호수아의 하는 말을 보면 그가 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왜 이렇게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일에 있어 자신들이 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직접 칼을 들고 나가 싸워 이겼다면, 전투를 하다가 죽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여기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 적은 전멸을 당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단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었던 전투. 이런 전쟁을 해 왔던 백성에게 아이 성에서의 패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앞섰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싸워 이긴 것이라면 약간을 피해를 본 것에 낙심하지 않고 또 전투에서 이기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면 이건 문제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리더십에 상당한 손상을 입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7-9절을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낙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난리냐? 내가 왜 이런 결과를 주었겠느냐? 이유 없이 내가 이렇게 했겠느냐? 그것은 이스라엘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11-12) 하나님은 여리고와의 전쟁 중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수6:18-19에 하나님은 여리고 성의 그 어떤 물건도 개인적으로 취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 전리품을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이 나누는 것은 당연시 여겼습니다. 그러나 때론 하나님이 전적인 파괴명령으로 전리품을 개인이 소유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께 드리도록 한 ‘하렘’ 규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었다는 고백의 표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전투에서 이 고백을 원하셨고, 이제 이 규례를 어긴 사람을 색출하기를 명하셨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아간’이라는 사람임이 밝혀졌습니다. 21절에 그가 전쟁 중에 숨긴 전리품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시날 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무게가 오십 세겔이 나가는 금덩이를 취하여 숨겼던 것입니다.

그 후에 공개재판과 공개처형이 이루어집니다. 아간이 숨긴 모든 전리품과 그의 자녀들과 그의 우양 및 소유 모두를 다 모아두고 이스라엘 백성이 돌로 쳐서 죽이고 불살랐습니다. 던진 돌은 무더기로 쌓였고 그 장소는 신약시대까지 명칭이 이어진 아골 골짜기였습니다.

마지막 26절에는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오늘까지’라는 단어는 여호수아서의 기자가 이 성경을 기록하던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시대 우리에게 전해져 오늘까지 읽혀지는 것은 우리가 아골 골짜기를 보며 생각하면서 깨달음이 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아골 골짜기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죄에 대한 면역이 생기기 전에 죄를 해결하자.

아간은 자신의 범죄를 그 누구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자신이 자백을 하기까지는 그랬습니다. 누구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될 때 우리는 죄 짓는 일에 더 담대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간의 경우, 하나님께서도 바로 죄인을 색출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7:13에 보면 하루의 여유가 주어졌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파, 족속, 가족, 개인별로 나아와 제비를 뽑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죄를 바로 지적하지 않으시고 다음날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파가 제비 뽑혔을 때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족속이, 그리고 그의 가족이 제비 뽑혔을 때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그 제비를 뽑게 되고 죄를 추궁 당하자 그때서야 그는 실토하고 자백하였습니다. 아간은 그 과정에서 많이 기다리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외면한 것입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라도 바로 그의 죄를 속히 깨닫고 회개했더라면 하나님이 그에게 내리신 징벌은 아골 골짜기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비교/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 32:3-5)



2. 개인의 죄가 공동체의 죄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아간 한 사람의 죄를 결코 간과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6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누가 범죄 하였는지 그 범죄 한 사람을 철저하게 추적하여 드러내고 그 사람에게 벌을 주십니다.(16-26)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지적하신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11절 말씀을 모두 봅시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하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범죄’였지 아간의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간의 범죄를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보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범죄가 개인적인 것이 될 때도 있고 전체적인 범죄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안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철저한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 속에서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철저한 순종에 따른 역사였습니다. 계속 이스라엘은 이렇게 정복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그 온전한 순종을 훼손시켰던 것입니다.

*극렬한 분노를 그쳤다는 표현.(26) - 공동체의 하나 됨을 훼손시킨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예)아니니아와 삽비라 사건



3.저주의 것을 축복이라고 오해하지 말자.

12절 말씀에 아간의 범죄 행위는 ‘이스라엘 자신도 바쳐짐’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바친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렘’(*      )은 ‘저주받은 것’을 뜻합니다.<6:17;  레 27:28>. 이 말은 여리고 성은 저주를 받은 것인데 아간이 그 저주 받은 성 안의 물건을 취함으로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는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여리고는 저주의 성이었습니다. 수6:26을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해집니다. 이 성을 재건하는 자는 장자가 죽고 계자 즉 막내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500년 후 BC 9세기 아합 시대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합 시대에 벧엘의 히엘이 여리고 성을 재건하다가 그의 두 아들을 잃게 됩니다.(왕상16:34) 장자와 막내가 죽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저주의 여리고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멸망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주 받은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눈길도 주지 않도록 구별 없이 여리고를 파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여리고를 파괴할 때에는 이것이 무엇인가 저건 무엇인가 살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들은 무조건 저주받은 것을 파괴하는 즐거움만 누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아간의 형편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을 지냈으니 정착민들이 가지고 있는 멋있고 좋은 물건들에 대해서는 볼 기회도 없었고 가질 수는 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이제 곧 정착민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가나안에서 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간이 어떤 집을 들어가 보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사르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 많은 집이었습니다. 그 중에 시날 산 외투는 너무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고 이어 좀 더 살펴보니 은과 금도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최상품 모피 코트에다 현금까지 만만찮게 있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불사른다는 말인가? 아예 보지도 말고 정말 말씀대로 닥치는 대로 부숴버리면 되는데... 이미 보았고 그는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버렸습니다.

아간을 어려운 형편을 지내고 있는 우리 교회 교인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막상 여리고 성 안에 들어가 보니 너무 좋은 것이 많았습니다. 저주 받은 성이지만 사람들이 죄인이지 뭐 물건이 무슨 죄가 있나? 그리고 지금 내 형편이 너무 딱하지 않나? 하나님 내 형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것 정도야 이해주시겠지.

여러분, 상황이 어려우면 온갖 생각이 다 듭니다. 조금만 길이 어긋나도 완전히 아닌 것 같고 조금만 길이 풀려도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립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인정해주시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죄악의 길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합리화시켜 버립니다.

아예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는 회복의 길이 있어도,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은 눈길도 줘서는 안 됩니다. 사단은 우리의 형편을 이용해서 그것으로 우리를 침몰시켜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갈 길이 아니면 가지고 말아야 합니다. 조금만 가보고 진짜 아니면 돌아서면 안 되냐고요? 그런데 일단 가면 돌아서기가 쉽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은 추하고 더럽고 저주스런 것조차 축복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현혹됨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맺으면서 - 구원 속에 멸망을 맛보지 말라.

여리고 성의 함락은 가나안의 함락의 서곡이었습니다.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사탄의 권세에 대한 완전한 정복인 것입니다.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사단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는 승승장구 정복의 역사를 새롭게 쓰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아이 성에서와 같은 쓰라린 패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패배의 당연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함을 말한다면 오히려 승리의 당연성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패배를 경험해야 하는 억울함을 말합니다.

억울함도 계속 반복되다보면 운명처럼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를 여호수아 시대의 이야기로만 두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 바로 우리 곁에 두고 자주자주 그것을 보며 교훈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아골 골짜기는 죽음과 저주의 처소로 알려졌습니다. 그것이 왜 그런 흉한 곳이 되었는지를 새겨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교훈입니다. - 아 멘 - (주후 200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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