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교회채널
 가정교회360
 예배생방송

사역의 지경이 넓혀지는 교회

주일오전예배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한 일
  • 날짜 : 2006.08.27
  • 본문 : 여호수아 5:2~12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한 일

성경> 수5:2-12

찬송> 31, 208, 396





●들어가면서 - 본문 사건 이해

오늘 본문 말씀으로 이전에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같은 본문이지만 여호수아 1장부터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이어 받고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도 본문의 한 부분만 떼어 따로 말씀을 들었을 때보다 말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좀 더 말씀에 집중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고 적용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도우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따라 요단으로 들어갔고 그 결과 요단강을 마른 땅 같이 건넜습니다. 드디어 그들이 학수고대하던 가나안 땅을 밟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 가나안 땅은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처럼 텅 비어있어 말뚝만 박으면 자기의 땅이 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셨던, 그리고 40년 전의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들어왔어야 할 바로 그 땅을 40년 만에 밟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기사(奇事)-기이한 역사로 말입니다. 이제 그들은 여리고 평지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바로 앞에 정탐꾼을 보냈던 여리고 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자마자 여호수아에게 한 가지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2절을 봅시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수 5:2)

 ‘그 때에’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때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할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시기상으로 볼 때 극히 비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넜다는 말은 가나안 땅으로 진입했다는 말이고  그것은 곧 바로 가나안 부족들과 일전을 치러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2장에서 본 대로 여리고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때문에 초비상이 걸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가나안 부족들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빨리 가나안으로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때가 시기상 밀과 보리를 추수하는 때였기에 요단강물이 가장 많고 물살도 셀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기적과 같은 방법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5:1에 이 사건에 대한 주변 나라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수 5:1)

가나안 족들의 시각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위험을 무릎 쓰고 요단을 건넌 것은 빨리 가나안을 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나안의 모든 왕은 지금 이스라엘 때문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시행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령하신 것으로 선민으로서의 표식을 몸에 새기는 의식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를 벗겨내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난지 팔일 만에 이 예식을 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갓 난 아기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는 종살이를 했지만 그래도 정착생활을 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애굽을 나오고 난 뒤 광야생활을 하면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언제 이동할지 모르기 때문에 광야에서 할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요단을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하고 난 뒤에 낫기를 기다렸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할례의식이 이스라엘 남성들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할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는 말입니다. 본래 난 지 팔 일만에 행하는 할례는 그렇게 큰 고통이 없습니다만 이미 장성하고 난 뒤에 할례는 큰 고통이 따릅니다. 지금처럼 항생제, 진통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위생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면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수술도구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34장에 이 할례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해 주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기를 서원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세겜 땅에서 만족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겜족의 추장의 아들이 야곱의 딸 디나를 추행하는 사건이 생깁니다. 이 일로 세겜 족은 야곱의 식구들에게 세겜 땅에서 많은 혜택을 줄 터이니 통혼을 하면서 자신들과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알게 된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의 누이가 추행당한 것을 알고 분노합니다. 특히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와 함께 같은 어머니 레아에게서 난 소생이었습니다. 복수할 기회를 찾던 이들은 세겜족에게 거짓 제안을 합니다. 자신들는 본래 할례를 행하는 민족이고 할례를 행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결혼을 시킬 수 없으니 당신들이 할례를 행하면 우리도 당신들과 결혼하고 이 땅에 살겠다고 말합니다. 이 제안을 세겜 족이 받아들여 세겜 족의 남성들이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를 행한지 삼 일째 되는 날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족을 급습하여 모두 죽여 버립니다. 삼 일째 되는 날은 가장 통증이 심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창34:25)>



본문의 이스라엘은 전쟁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와도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명하셨고 여호수아는 그 명령에 따라 시행하였습니다. 이 할례 예식이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명하셨고 여호수아는 순종함으로써 그 일의 중요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일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누구나 다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이라는 곳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만 이 할례 예식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이들이 요단강을 건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느냐는 것은 오늘 성경 본문 바로 앞 4장, 지난주일 말씀에 자세히 나와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선두로 해서 강물에 들어가자 강물을 끊겼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기적적으로 강을 건넜습니다.

그 장면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4:23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수4:23)

바로 40년 전 출애굽 할 때 홍해바다가 갈라진 사건입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육지를 건너듯 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따라 들어온 애굽의 군대들은 물속에 빠져 죽어버렸습니다.



이 홍해 사건을 신약시대에 바울은 해석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 가운데로 지나면서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0:1-2)

세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확증하는 예식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가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산 것과 같은 의미가 그 사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홍해는 사실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따라 홍해 한 가운데로 들어왔던 바로의 군대의 죽음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니 의미상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면서 죽었다가 다시 산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려고 했던 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은 천국을 의미합니다.(찬송가에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천국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통해 노예로 살던 땅을 나왔지만, 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들의 죄를 씻고 거듭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거듭남의 역사, 죽고 다시 사는 역사,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사건이 홍해 사건입니다. 즉 죄와 함께 살던 애굽에서의 나는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역사가 홍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제 1세대들은 이 과정을 홍해를 통해 거쳤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가나안에 들어갔더라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제 1세대는 40년 광야생활을 거치면서 그들 자신의 범죄 때문에 다 죽고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제 1세대가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이 이미 받으셨습니다. 그들의 육신이 단지 가나안을 밟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제 1세대가 광야에서 죽고 40년 간 광야에서 제 2세대인 ‘광야세대’가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이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 요단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복하고 누리고 살 세대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모든 사람들은 홍해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1세대에게 세례가 필요했던 것처럼 제 2세대 역시 세례가 필요했습니다. 1세대의 거듭남이 2세대의 거듭남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구원받음이 육정이나 혈통으로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요1:13)

2세대 역시 그들 죄의 사함을 받고 거듭남이 없으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2세대들에게 거듭남의 의식이 바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할례를 행한 것은 그들이 약속의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들어와 살기에 적격한 자들입니다.”라는 고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할례예식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예식입니다. 아니 거듭나지 않았으면서도 할례의 표식만 간직하고 있을 때 더욱 문제가 됩니다. 모세도 할례의 본질은 육신의 표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고 말하면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했습니다.(신10:16)



성도 여러분, 1세대이든 2세대이든 누구든지 거듭나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거듭남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거듭남이 없으면 천국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밤늦게 영생의 문제로 자신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유대의 관원이었습니다. 권세와 명예가 있다고 거듭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물질을 나눠주면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얽매여 있는 물질이 진정한 영생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물질이 있다고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 집 문에서 거지로 살았지만 부자보다 더 행복했던 나사로를 압니다.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사후에 증명이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에 갔지만 부자는 불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나지 못하면 마귀들과 그의 사자들을 위해 예비 된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육신적인 출생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다운 것은 거듭났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육신만 태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영혼이 없는 짐승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새끼로만 태어나면 안 됩니다. 자녀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2. 거듭난 자는 자신의 정체를 항상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곧 누구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자기 몸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표식이었습니다. 물론 할례는 고대 근동지역에 널리 행해지던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태어나자 바로 그들의 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인식을 새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몸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인식 속에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몸에 있는 하나님의 표식인 할례보다는 심령의 할례를 강조했습니다만(롬2:29) 이것은 이들이 본래 가져야했던 할례의 정신이 왜곡되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가끔 보면 어떤 조직이나 단체는 그 조직원의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통일된 표식을 가집니다. 복장을 통일하기도 하고, 같은 모자를 쓰기도 합니다. 뺏지를 같이 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성이 강조 될수록 더욱 몸에 새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폭들은 몸에 문신을 새깁니다. 그만큼 조직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결연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자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기적과 감격으로 건넜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곧 그들 가운데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을 잊을 것입니다. 요단강은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갈라져 마른 땅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에 있는 하나님의 표식은 한번 새기면 영원한 것입니다. 그들은 요단강의 하나님의 역사를 그들의 몸에 새겨 살아가는 백성이어야 했습니다. 그 의식이 있어야 그들은 앞으로도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할례는 오늘날의 ‘공적세례예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공적세례예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요단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세례와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를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들 스스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 행하신 세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말할 때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나눕니다. 세례공부를 하시면 이에 대해 문답이 나옵니다.

※세례문답서 신앙과 교리에 관한 문답 23.에 “세례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세례 - 목사님이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로서, 성령세례를 받은 자에게 공적으로 베푸는 예식입니다.

성령세례 - 성령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물세례는 사람이 행하는 눈으로 보이는 예식이요, 성령세례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루어진 홍해와 요단강의 세례는 하나님이 주도하신 성령세례요, 할례의식은 이 성령세례를 통과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도록 행한 물세례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은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너무나 위대한 일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또 다른 시작입니다. 무슨 시작입니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 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의 열매를 함께 가지고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날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흔적을 내가 가져, 내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표식으로 날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좀 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세례 서약문에는 이런 부분에 대한 것이 좀 약합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좀 포함시키면 좋겠습니다. 결혼 서약할 때

“이제부터 평생토록 즐거우나 괴로우나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도 그대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오늘의 이 약속을 지키기로 굳게 서약합니다.”라고 서약합니다.

이것의 내용을 조금만 바꾸어 서약문으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이제부터 평생토록 즐거우나 괴로우나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도 믿음(주님)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죽음이 나의 생명을 취할 때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오늘의 이 약속을 지키기로 굳게 서약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이 이 땅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신하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은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내가 누구냐’라는 것이 확실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신분의 확실성이 삶의 확실성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에서 적의 위험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할례를 행하게 했던 하나님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맺으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광야시대를 청산하고 가나안의 새 시대를 열기를 소원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분배하고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체성 점검을 요구하셨습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냐? 그 구원의 표식을 갖고, 잊지 않고 사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의 영적인 점검을 통해 나는 거듭난 자인가를 돌아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분명한 의식 속에 가나안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주후2005-04-03)
주일오전예배 목록
번호 설교제목 설교자 설교본문 설교일자 조회
260 요셉지파의 불평 여호수아 17:14-18 2006.11.5 2616
259 유다 지파의 분배 받은 땅 수15:1-12 (구약342P) 2006.10.29 1122
258 영적 침체 왕상19:1-8 2006.10.22 805
257 나의 이력에 무엇을 남기겠습니까? 성경> 수12:1-23 2006.10.15 766
256 정복과 정착 수11:16-12:6 2006.10.08 702
255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여호수아10:1-15 (구약333) 2006.10.01 1862
254 속이고도 살아남은 기브온 거민 수9:1-15 2006.09.24 1123
253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라 여호수아 8:1~17 (구약329) 2006.09.17 599
252 아골 골짜기 여호수아 7:16-26 2006.9.10 1014
251 여리고 전투 명령 여호수아 5:13~6:14 2006.09.03 1011
열람중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한 일 여호수아 5:2~12 2006.08.27 1088
249 요단강을 건너라 여호수아 3:1~17 (구약322) 2006.08.20 994
24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여호수아 2:1~14 (구약321) 2006.08.13 869
247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것 여호수아 1:10~18 (구약320) 2006.08.06 819
246 가나안 시대를 향하여 여호수아 1:1~9 (구약319) 2006.07.30 771
게시물 검색

장산교회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