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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인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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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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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나안 여인의 믿음
성경> 마15:21-28
찬송> 331, 363장


● 두로와 시돈에서 생긴 일
오늘 본문 15:21에 예수님은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라고 되어 있고 오늘 본문이 마치고 이어지는 15:29절에는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라고 되어 있습니다. 21절의 '거기서'는 갈릴리 가버나움 지방이고 29절의 '거기서'는 두로와 시돈 지방입니다.
15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시비를 걸었습니다.
신앙의 전통을 위반했다는 것인데, 식사할 때 손을 안 씻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너무도 분통이 터지셨는지 그들을 마구 야단치셨으며, 계속 그 문제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속을 털어 놓으셨습니다. 그 장면이 오늘 본문 앞부분인 1~20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곧장 이방지역인 수리아(두로와 시돈)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도중에 어디로 들러서 전도하신 것도 아니고, 그냥 북쪽 끝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방 지역으로 오신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사건을 경험하고 다시 이스라엘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풀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한 사건이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던 사건이었고 다시 힘을 얻어 이스라엘 내에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길래 예수님을 감동시켰는지, 우리는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가나안 여인의 믿음
오늘 성경 본문에 한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막7:26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귀신들린 자신의 딸 문제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22절이 예수님을 만남 여인의 첫 번째 외침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실제로 딸의 문제로 예수님께 나온 이 여인의 외침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그렇게 큰 외침에도 예수님은 못들은 채 하시고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고 그냥 길을 걸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유대인들에게서 당한 상한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선, 이 여인이 했던 예수님의 호칭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알고 믿고 있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는 눅18장에 소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고백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들었을 때 가던 길을 멈추고는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 고백이 그만큼 중요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소경이나 가나안 여인의 측면에서 본다면 "나 예수믿어요!" "나 하나님의 자녀예요!"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하며 왜 남의 족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구원자 메시야라는 고백이기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구원자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리라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혈통(족보)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구원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말하면서 정확한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준 것처럼 이 가나안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어야합니다. 그런 데 예수님은 동일한 고백을 받고도 이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둘 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고 다른 한 사람의 소원은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김집사의 문제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나에게는 왜 이렇게 무관심한 것일까? 박집사는 기도를 하면 그렇게 잘 응답을 주신다고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기도하는데 응답이 없는 것일까?

성도의 애타는 간구에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우리 주님을 두고 이 여인도 불평, 불만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이 보여준 행동을 봅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고자하는 핵심입니다.

1. 인내 - 여인은 예수님의 반응이 없어도 따라갔습니다.(25)
첫째는 인내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박절한 반응에도 관계없이 계속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여인의 애타는 외침은 제자들에게까지 안타깝게 전해진 것 같습니다. 23절에는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안되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님이 이렇게 무심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 예수님이 듣지 못하신 것인가?
"예수님 지금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안되겠습니까?"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

이 말은 제자들이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계속해서 따라 오는 바로 그 여인이 들으라고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여인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서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방 여인인 너에게까지 관심을 보여야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이 이방지역에 잠시 쉬러 왔다. 이방 사람인 너희들에게 관심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낙심될 수 있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인은 이 말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처음에 그가 했던 대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오히려 이 말을 듣자 더욱 가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이런 일 만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분명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합니다. 나는 분명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정말 사정이 딱하고 애타서 마음을 썩고 있는데 예수님은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때가 중요한 때입니다. 조금 더 무던히 주를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설마 나를 죽이시겠나 생각하며 끝까지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시 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주님이 무관심하시면 그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전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인을 많이 무시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이제 여러분에게 그 심정을 알리시는 시기일 수 있습니다.
예)둘째형 가출했을 때, 어머니가 몇 번이고 찾아다니다가 결국은 어머니가 모른 채 한 일.

우리는 나 자신이 주님께 했던 섭섭한 행위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보지 않고 내가 아쉬울 때만 주님께 애원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낸 무관심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주님의 부름에 대해 얼마나 많이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행했습니까?

그러므로 철저히 하나님의 침묵에 때로는 여러분이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여전히 지켜보고 계실 뿐입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낙망하지 마시고 이 시험, 테스트에 합격하셔야합니다.

2. 자존심을 버리고 아멘 - '개'라고 하여도 따라 갔습니다.(26)
둘째로 여인은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아멘하고 따라갔습니다.
계속 따라오며 도와 달라고 하는 여인의 말에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기는커녕 더욱 상처 주는 말을 하였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6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주님이 하시지 않아야 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까지 할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 그녀의 문제를 풀어주기 싫다면 적당히 돌려보낼 일이지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해서 돌려보내서야 되겠습니까? 도대체 우리 주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철저하게 이 여인을 무시하기로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인 유대인에게 주어야할 것을 개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내가 왜 주겠느냐는 말입니다.

이에 여인의 반응이 27절에 나타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정말 속도 없습니다. 개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돌아갈 일인데 그렇지 않고 개라고 부른 자신을 인정했습니다. '주님이 개라고 하면 나는 개다!' 그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문제의 해결이 없습니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그 말씀에 대한 인정이 있을 뿐입니다.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아멘"한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 말씀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앞에 여러분의 자존심을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1)나아만의 자존심 - 엘리사가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7번 몸을 씻으라고 했을 때, 그는 처음에 분노하였지만 나중에는 그의 자존심을 버리고 요단강에 7번 몸을 씻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예2)아브라함의 순종 - 인간적인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자신의 아들을 모리아 산의 제물로 드렸더니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존심을 세우려면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의 자존심을 세우십시다. 인간적인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오직 주님에게서만 -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상주실 것을 믿었습니다.(히11:6)
셋째는, 오직 주님에게서만 해결이 있다고 믿고 따라갔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한 두 번의 거듭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여인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 간 것은 문제의 해결이 예수님께만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나에게 귀하고 복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여인을 말했습니다.(27)
주님이 자신을 개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개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적어도 개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주인 곧 예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면 부스러기라도 취할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인의 장막보다 하나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낫다'는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 집의 장막 안에 거하는 것이 좋지만 그것이 안되면 하나님 집의 문지기도 감사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집의 문지기보다는 부귀영화만 준다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에도 즐겁게 취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것만을 귀하게 여기고 사모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리시는 것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갖고 눈을 돌리게 될 때,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낭패와 실망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다가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립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기웃기웃하다가 결국 낭패를 당합니다.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점과 사주를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 한 분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철학관 선전 광고에 기독교인 환영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이런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 주위에 있는 무당과 점 집에 대나무가 뽑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이형택, 이용호씨 / 지금도 수사가 계속되고 있는 소위 이용호게이트의 보물선 발굴 사건도 한 무당의 말을 믿고 벌인 헤프닝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조카 이형택씨가 '진도 해저 보물발굴 사건'에 개입하게 된 동기가 서울 사당동에서 점집을 차려놓은 천기도선사라고 불리우는 김씨의 꾀임에 빠져 벌인 사건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용호씨는 장로교 안수 집사이고 이형택씨는 감리교 권사입니다.

● 예수님을 감동 시킨 이방 여인 -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그렇게 무시하셨던 것은 이 여인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자녀들의 고통을 지켜 볼 때가 있지만 그것은 정말 자신이 겪는 고통보다 더한 아픔이지 않습니까?
여인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이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첫 번째 냉담한 반응에도, 두 번째 자존심 상하는 모욕적이 언사에도 이 여인은 끝까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고백은 정말 주님을 감동시키는 답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님니다 그러나 어찌 그런 무지막지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옳소이다 그러나 나는 좀 잘 봐주시면 안됩니까?" 이 정도의 말이 아니라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의 마음이 흡족하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결과는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이 힘들 때, 그 때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감동을 받고 새 힘을 얻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도 사역을 하시면 힘드실 때가 있는데 한 번씩 생각 밖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 보람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냉담한 반응과 심지어 적대적 반응으로 지금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곳에서 진정한 믿음의 여인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기쁨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동안 이렇게 예수님을 감동시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1)백부장의 믿음(마8:5-10)/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예2)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위(마26:13)/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의 일로 인하여 속상하듯이 주님은 오늘도 자신의 백성들의 일로 속상할 일이 많으십니다. 그 때 주님의 위로가 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생각지 않았던 믿음의 반응으로 말입니다. 주님이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네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적절한 반응으로 여러분의 소원을 성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믿음이 있습니까?
좀 더 무던하게 주님을 따라 갑시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 맺으면서 - 마지막 승자가 진짜 승자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도 독특하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이 믿음의 길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멸시와 천대가 오고, 개와 같이 취급을 당하더라도 불평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진리만 따라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간다고 하여 일사천리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이 내어버린 듯이 버려 두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과 함께 가시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같이 느껴지고 개와 같은 자리에 처해 있어도 계속 예수님을 따라 가야합니다. 끝까지 따라가면 마침내 큰 은혜와 복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끝가지 따라가는 신앙이 큰 믿음입니다. 바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가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보여준 신앙의 모범을 오늘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 그대로 실현시켜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고 끝내 믿음의 복된 열매도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주후2002.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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