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교회채널
 가정교회360
 예배생방송

사역의 지경이 넓혀지는 교회

주일오전예배

요단강을 건너라
  • 날짜 : 2006.08.20
  • 본문 : 여호수아 3:1~17 (구약322)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요단강을 건너자

성경> 수3:1-17

찬송> 31, 169, 456





●들어가면서 - 요단강가에서의 3일

지난 주일의 말씀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제목으로 여리고 성의 라합과 이스라엘의 정탐꾼의 대화를 통하여 라합이 가진 믿음을 중심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을 파송한 싯딤이라는 곳에서 요단강가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역사적인 사건을 경험할 바로 그 요단강가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바로 강을 건너지 않고 또 강가에 진을 칩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은 강가에 진을 치고 삼 일 동안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삼 일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어떠했을까요? 바로 옆에 급하게 흐르는 요단강을 보면서 지낸 3일 동안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바로 이 강을 건넌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일으키실 역사에 대한 설렘도 있었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이 강을 건너야 한다는 말인가?’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3일 동안 그들이 그 강가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건너기 위해 요단강 바로 앞에까지 왔지만 그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이 선뜻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1:17-18절에는 모세의 말을 따른 것처럼 여호수아의 말을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여호수아 당신의 말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싯딤에서의 믿음이고 요단강물 바로 앞에 오자 넘실대는 물을 보면서는 또 마음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의 이 3일은 이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꼭 필요한 지침을 전달하는 기회였습니다. 요단강은 아무렇게나 해서 건널 수 없는 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는 원리가 곧 천국백성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광야를 청산하기 위하여 이렇게 요단을 건너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요단강을 건넙니까?



1.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라.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널 지침으로 제일 먼저 언약궤를 앞에 세워라고 말씀하십니다.(3,6)

3절.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간 광야에 있을 때에 항상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유진하던지 행진을 하든지 성막 주위를 12지파가 3지파씩 나누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 성막의 가장 핵심이 언약궤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란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야 하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요단강을 건널 때에 제일 앞에 두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제일 앞서 가면 그 뒤를 백성들이 따라 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앞서 가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군에 가면 야간에 정숙보행을 합니다. 그리고 지뢰지대를 걷는 연습을 하면 제일 앞에 선 사람이 자기 앞에 지뢰가 있는지를 점검한 뒤에 한 걸음을 나가고 또 검사 후에 한 걸음을 나가고 합니다. 그러면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일렬로 서서 앞 사람의 발자국만을 밟으면서 따라가게 됩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의 안전은 제일 선두에 있는 병사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냥 건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먼저 가시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리더자이십니다.

리더와 보스의 차이를 아십니까? 리더는 앞서 가면서 따라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스는 가라고만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보스가 아니라 리더이십니다. 항상 앞서 가셔서 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혀 생소한 길을 가십니까? 그래도 자세히 보면 주님이 앞서 가시면서 오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곁에서 동행하기도 하시지만 위급한 때면 항상 먼저 가십니다. 그리고 앞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가보지 못한 길입니다. 간 적이 없는 길입니다. 경험도 없고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언약궤만 따라가면 문제없습니다.



이제 이렇게 따라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과를 봅시다. 17절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 3:17)



앞서 들어간 여호와의 언약궤는 강 한 가운데를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그들이 건넌 곳은 강이 아니라 육지나 다름없습니다. 언약궤는 마른 땅에 굳게 서 있고,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강은 이미 육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찬송360, “예수 나를 오라 하네” 후렴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갈 길에 때로는 넘실대는 요단강이 있을지라도 그 땅을 주님과 함께 마른 땅과 같이 건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성결케 하라! - 하나님의 역사의 전제 조건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이 대 역사를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 편에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 기사를 행하시리라.”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기사(奇事) - 기적과 같은 사건을 일으키시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성결케 하는 일은 두 가지 방편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하나님이 성결케 해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써 정결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이 나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깨끗케 하지 않으면 이 요단을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성결케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성결예식을 명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예식이란 때로는 옷을 빨래하는 것이었습니다.(출19:10,14) 때로는 부인과 동침을 피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출19:15)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것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시간적으로 빨래를 하거나 부인과 자리를 같이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심령이라고 봐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이 성결예식을 통하여 원하셨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의복을 깨끗이 하므로 해서 그들은 자신의 심령이 그렇게 되기를 원해야 했습니다. 부인을 멀리함으로 해서 자신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가까이 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마음의 성결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만을 따르는 마음, 세상에 의지할 다른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마음, 바로 그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단강을 건너려면 딴 생각으로는 건널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가까이 하여 그 분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결입니다. 한 여자의 성결은 다른 남자 생각하지 않고 한 남자에게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결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두고 그 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단을 건너다가 거친 물살로 실족하게 됩니다. 도저히 건널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광야를 또 맴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 역사를 경험하려면 때로는 홀려야 합니다. 누구에게요? 하나님께. 어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간증하시는 분들의 말의 공통점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결은 곧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3. 이제 결단하고 행동하라.(14-15절)

이들은 지금 요단강을 유람하기 위해 온 자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삶에 있어 엄청난 전환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요단을 건너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의 땅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광야에 있을 것인가?

이들은 선택하고 결단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선택에 따라 가나안과 광야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홍해와 요단강의 다른 점을 말할 때 그것은 선택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홍해는 죽음의 막다른 길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길이었습니다. 뒤로 돌아가도 바로의 군대에 의해 죽을 것인데 누구인들 갈라진 바다로 뛰어들지 않겠습니까? 정신없이 건넌 것입니다. 바다 저편으로 정신없이 건너고 보니 대적은 죽고 나는 산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다릅니다. 건너기 전부터 3일 동안이나 넘실대는 물을 보고 있습니다. 건널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건너면 가나안이요, 건너지 않으면 다시 광야입니다. 건너면 축복의 땅에서 새 삶을 누리는 것이요, 건너지 않으면 여전히 메마른 광야생활입니다.



요단강을 건넜다는 말은 가나안을 차지했다는 말입니다. “아니, 지난주일 말씀처럼 여리고 성과도 싸워야 하고 가나안의 많은 족속과도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0절.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수 3:10)

‘이 일’이 무엇입니까? 이 일은 바로 요단을 건너는 일입니다. 즉 요단강을 건너는 일을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의 증거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단을 건넜다는 말은 가나안은 내 것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단을 광야와 가나안의 경계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이 경계 너머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요단을 넘는 순간부터 그 땅은 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이 요단을 건너기로 결단하고 건너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결단하고 건넌다고 해서 이 요단을 하나님이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요단을 건너기로 결단하는 것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신뢰하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18에,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행함으로 그 믿음을 나타내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입니다.



14-15절에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기 위해 일어났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은 그들 앞서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여전히 세차게 흘러내리는 요단을 보면서도 그들의 발을 요단강으로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결단한 것입니다. 어쩌면 또 한번 더 죽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죽기로 작정하니 사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영적인 원리로 태어난 사람은 이 원리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살기위해 날마다 죽는다고 말합니다.(고전15:31)



광야의 삶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요단강의 모험이 무가치하게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요단을 건너려는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광야의 삶은 이들의 체질화가 되었습니다. 조금만 누추하기로 작정하면 광야의 삶도 충분히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광야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로 배불렀던 곳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아도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뿌리지 않았으니 추수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곳이 아니었습니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였습니다. 그러기에 광야에서는 항상 애굽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조금 괴롭다고 생각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애굽으로’ 외쳤습니다.

가야할 목적지를 분명히 하지 못해 당한 고통은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의 세대로 족합니다. 그들은 40년을 돌아 돌아서 요단강 앞에 온 것입니다.



오늘 새벽기도 큐티책에 이런 예화가 나왔습니다.

먹이를 따라 지중해를 떠나 북해로 이동하는 기러기가 있었습니다. 그해도 어김없이 북해를 향해 하늘을 날아가던 기러기 중에 한 마리가 시골집 우리 안에 있는 오리들을 발견했습니다. 오랜 날개 짓으로 피곤했던 기러기는 한가로이 쉬면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 집오리가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대열에서 이탈해 집오리들이 있는 우리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날은 구정물과 밥풀로 실컷 배불리 먹고 하룻밤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기러기는 다음날 떠나려고 했지만 너무 편하고 행복해서 떠날 것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고 판단한 기러기는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러기는 날 수가 없었습니다. 살이 너무 쪄버려 이제는 공중을 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넓은 창공을 향해 날개를 펼쳐야 할 기러기가 그만 우리 안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란 결단이며 위탁인 것입니다. 앞길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는 우리 주님이 앞서 가십니다.  우리가 주님에게만 마음을 두면 그 분은 위기의 한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지키고 계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친 강물도 마른 땅같이 지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주후2006-08-20)
주일오전예배 목록
번호 설교제목 설교자 설교본문 설교일자 조회
260 요셉지파의 불평 여호수아 17:14-18 2006.11.5 2616
259 유다 지파의 분배 받은 땅 수15:1-12 (구약342P) 2006.10.29 1122
258 영적 침체 왕상19:1-8 2006.10.22 805
257 나의 이력에 무엇을 남기겠습니까? 성경> 수12:1-23 2006.10.15 766
256 정복과 정착 수11:16-12:6 2006.10.08 702
255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여호수아10:1-15 (구약333) 2006.10.01 1862
254 속이고도 살아남은 기브온 거민 수9:1-15 2006.09.24 1123
253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라 여호수아 8:1~17 (구약329) 2006.09.17 599
252 아골 골짜기 여호수아 7:16-26 2006.9.10 1014
251 여리고 전투 명령 여호수아 5:13~6:14 2006.09.03 1011
250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한 일 여호수아 5:2~12 2006.08.27 1087
열람중 요단강을 건너라 여호수아 3:1~17 (구약322) 2006.08.20 994
24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여호수아 2:1~14 (구약321) 2006.08.13 869
247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것 여호수아 1:10~18 (구약320) 2006.08.06 819
246 가나안 시대를 향하여 여호수아 1:1~9 (구약319) 2006.07.30 771
게시물 검색

장산교회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