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교회채널
 가정교회360
 예배생방송

사역의 지경이 넓혀지는 교회

주일오전예배

깊은 곳에서 부르짖나이다
  • 날짜 : 2006.07.23
  • 본문 : 시편 130:1~8(구약899)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산다!’는 사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실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행복한 삶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의 특별한 보호와 은혜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자녀는 구약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로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그러나 이 복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백성)의 길도 스스로 그 길을 가려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날 왕이 길을 지나다가 거지를 발견하고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 왕궁에 데려다가 왕자를 삼았습니다. 어느 날 왕궁에 있는 그 모든 것은 다 이 거지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자가 되고 보니 왕자로서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귀찮고 힘들게 보이는 겁니다. 이 훈련받지 않으려 하면 자기에게 다가온 그 많은 복은 자신의 것으로 주어졌지만 결국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즉, 왕자가 왕자의 길 걷기를 거부하면 그는 왕자가 아니라 다시 거지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너무나 특별한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길을 거부하면 우리의 입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말의 감격은 없어지고 맙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큰 짐으로 여겨지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은혜도 느끼지 못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갈 때 어느 한 순간에 막다른 길에서 “아, 이젠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라는 탄식과 비명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그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생활해야 했던 바벨론 포로기(BS 596-538)에 지어진 시로 추정됩니다. 우리는 이 시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한 사람의 탄식과 절규를 보게 됩니다.

본래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 할 민족이냐면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살 민족이었습니다.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오히려 더위 때엔 그 잎이 청청하게 살 민족이었습니다.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않아야 할 민족이었습니다.(렘 17:8)

시125편에 의하면 ‘산들에 둘린 의인들의 땅에서 굳게 선 시온 산처럼 살아야 할 백성들’(시125:1-3)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산들 혹은 언덕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 자체가 또한 요새였다.

※사무엘 하서에 다윗이 마지막으로 공격하여 얻는 성이 여부스 족속이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도 점령하지 못했고, 사사시대는 그대로 방치된 채로 있었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오아이 되자 여부스 족속이 있는 예루살렘을 쳐서 자신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할 때 여부스 사람들이 했던 말이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성이 얼마나 요새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 행복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 속에 살아야 할 사람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쩌다가 이런 탄식 속에 살게 되었는지요?

그들은 적들조차 침공하기에 어려운 이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성에 살면서 스스로 성문을 열고 적들을 맞아들인 자들과도 같았습니다. 이방의 타락한 종교와 문화, 악한 풍습과 가치관들을 두 손 벌려 받아들였습니다. ‘악인의 권세’가 의인들의 땅에 홍수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들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그들을 둘러 지키던 은혜의 울타리를, 스스로 거둬버리고 말았습니다.



1. 주님, 나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1-2)

시인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깊은 곳’에 비유하고 있습니다.(1)

다윗은 시69:1-2에서 일찍이 자신의 힘든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 69:1-2)



그러므로 여기서 시인이 자신의 형편을 ‘깊은 곳’이라고 헤어 나오기 힘든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혀 소망이 없고,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곳입니다. 그곳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치고 다시스로 가던 요나가 빠지고 만, 그 깊은 바다입니다. 요나는 한 줄기 빛도 없는 고래 뱃속에 갇혔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대한 바벨론이라는 입 속에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깊은 곳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요나는 고래의 뱃속을 ‘스올’이라고 말했습니다.(욘2:2) 스올은 지옥입니다.

천국의 삶을 누려야할 하나님의 자녀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보나 지금 나의 삶이 지옥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어디에서 이 ‘깊은 곳’이 시작되었을까요? 무엇이 이 깊은 곳으로 몰았을까요?

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무시하면서 시작된 죄입니다. 특별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열등감처럼 생각하고 버리기 시작하면서 출발한 나의 죄 때문입니다. 그 어디에도 이 만한 행복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다른 것에 기웃거리면서 침을 흘린 우리의 모습이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다 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영영 버림받은 듯한 무서운 절망감이 엄습합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시인의 용기를 본받아야합니다.

시인은 지금 자신이 처한 곳이 깊은 곳이라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마저 다 등을 돌려버린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등을 돌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잠간 우리의 태도를 지켜보시는 것뿐입니다.



2. 주님, 사유하심이 주께 있습니다.(3-4)

시인이 그 ‘깊은 곳’에서 붙들었던 유일한 생명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본질, 속성)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3-4)

※사유하심 -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심.

이는 “주께서 사람의 죄악을 일일이 헤아리신다면 주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용서하심이 주께 있음을 압니다. 이에 내가 주를 경외합니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죄를 자복하고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자에게 용서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속성을 붙잡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이는 참으로 뻔뻔한 것입니다. 일을 자신이 다 저질러 놓고 하나님께 수습해 달라고 하는 것(하나님이 수습해 주지 않으면 누가 해 주겠습니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잘못할 때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이 지금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말씀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경고도 하셨습니다. 끝까지 행실을 고치지 않는다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간섭하면서 ‘그게 네 길이 아니다.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네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많이 말씀하시며 훈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애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못 들은 듯, 그 길로 갔던 나 자신이기에 도무지 돌아갈 염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관계로서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고, 심지어 그렇게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말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무슨 낯으로 그 사람에게 다시 찾아가서 부탁을 합니까?



그러나 “주여, 주께서 죄를 지켜보실진대 주 앞에 설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죄를 용서하심이 주께만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렇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우롱(기만)하는 행위처럼 생각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잘못 했다고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분인 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속성을 악용하는 행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시인은 ‘사유하심’이라는 이 하나님의 속성을 믿으면서도 너무나 하나님께 죄송한 것입니다. 이렇게 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 죄송한 것입니다. 그는 4절 끝에 “주를 경외하게 하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뻔뻔하다고 해야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뻔뻔함’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boldness)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boldly)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여기에서 ‘boldness’이란 ‘담대함, 무모함, 뻔뻔함’을 말합니다.



3.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주를 기다립니다.(5-6)

이제 시인에게서는 기다리는 것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다림이 얼마나 큰 믿음인지 아십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다립니다.

기다리다 포기한 사람이 많습니다. 기다리다 사단의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다 너만 손해야, 하나님이 어딨어? 하나님도 너를 외면 하시는거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이젠 모든 것을 다 잃고 손들고 주께로 나왔는데 더 이상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기로 작정한 이상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OK사인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다림의 화신'들이었습니다. 요셉은 13년, 다윗은 15년, 야곱은 21년, 아브라함은 25년, 모세는 40년, 노아는 120년의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습니다. 그 열매로 그들은 영광과 축복과 구원의 열매를 넘치도록 거두었습니다.

세상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인내의 열매입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10년,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는 26년, 웹스터의 '웹스터 사전'은 36년, 괴테의 '파우스트'는 60년이 걸린 역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졸속품이 아닌, 걸작품으로 세상에 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힘겨워 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은 힘써 우리를 완성해 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정한 시한 내에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와 권능을 신뢰하며, 믿음과 소망 중에 기쁨으로 인내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기다림이 단순히 '손놓고 기다림'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 기다림 속에 우리의 간절함이 담기도록 해야 합니다. 시인은 5-6절 말씀에서만 기다린다는 표현을 4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라고 말했던 야곱과 같이 결연함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지만 또한 천년이 하루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최선을 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진실되다는 것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매를 기다리며 쉼 없이 손을 놀리듯,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역량을 참을성 있게 성실히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마치면서 - 다윗의 기다림의 결과 ‘새노래’(시40:1-3)

“[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1-3)

그도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1a -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결국 응답을 받았습니다.(1b)

그의 이전 상황은 수렁과 웅덩이였습니다.(2)

그는 이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3)



이와 같은 찬송이 우리의 입술에도 간증으로 울려퍼지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주후 2006-07-23)
주일오전예배 목록
번호 설교제목 설교자 설교본문 설교일자 조회
260 요셉지파의 불평 여호수아 17:14-18 2006.11.5 2615
259 유다 지파의 분배 받은 땅 수15:1-12 (구약342P) 2006.10.29 1122
258 영적 침체 왕상19:1-8 2006.10.22 804
257 나의 이력에 무엇을 남기겠습니까? 성경> 수12:1-23 2006.10.15 766
256 정복과 정착 수11:16-12:6 2006.10.08 702
255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여호수아10:1-15 (구약333) 2006.10.01 1862
254 속이고도 살아남은 기브온 거민 수9:1-15 2006.09.24 1123
253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라 여호수아 8:1~17 (구약329) 2006.09.17 599
252 아골 골짜기 여호수아 7:16-26 2006.9.10 1014
251 여리고 전투 명령 여호수아 5:13~6:14 2006.09.03 1011
250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한 일 여호수아 5:2~12 2006.08.27 1087
249 요단강을 건너라 여호수아 3:1~17 (구약322) 2006.08.20 993
24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여호수아 2:1~14 (구약321) 2006.08.13 869
247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것 여호수아 1:10~18 (구약320) 2006.08.06 819
246 가나안 시대를 향하여 여호수아 1:1~9 (구약319) 2006.07.30 771
게시물 검색

장산교회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