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교회채널
 가정교회360
 예배생방송

사역의 지경이 넓혀지는 교회

주일오전예배

"내가 너를 세웠노라"
  • 날짜 : 2006.04.23
  • 본문 : 예레미야 1: 1 - 10(구약 p 1050)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내가 너를 세웠노라

성경> 렘1:1-10

찬송> 351, 353



●들어가면서 - 말씀의 배경

남유다의 백성들은 요시야 왕의 개혁조치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혁을 거부하였다. 이어서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가 통치하면서 국운은 쇠퇴하여 갔습니다. 결국 B.C. 58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유다백성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로 이 유다 왕조의 몰락 과도기 곧 B.C. 627년(요시야 재위 13년)부터 B.C. 587년까지(시드기야 재위 11년) 40년 정도의 기간이 예레미야서의 시대적 배경입니다.

40년 안에 왕이 4번이나 바뀔 정도로 정권이 불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습니다.



1. 하나님은 나를 세우실 때는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세우십니다.(4-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시면서 “네가 너의 엄마의 뱃속에 잉태되기 전에 너를 알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릴 때부터, 네가 젖먹이 때부터 내가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뱃속에 있기 전부터 알았다는 말은 이치상 맞지 않습니다. 혹 엄마 뱃속에 있을 때라고 하면 그래도 잉태가 되었으니까 그 생명이 존재한다고 보면 이해할 근거가 조금이나마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논리나 합리로만 따진다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잉태되기도 전에 알고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이 땅에 존재하기도 전에, 내가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 있기도 전에 나를 안다는 말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미술작품을 감상하게 될 때 그 작품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작품은 작품으로 완성되기 전에 이미 작가의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있기도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엡1:4-5에는,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땅에 버려진 아이들은 희망이 없습니다. 저와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릴 때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고 새 어머니와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든지 어머니의 은혜라는 말은 항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가 실감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살려낸 것은 성경 한 구절이었습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는 자신의 존재 근원을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찾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날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구나!’라는 사실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다. 나의 지난날들을 아시고 나의 생각도 아시고 나의 형편 처지도 다 알고 계신다는 이 사실이 느껴지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는 더욱 깊이 다가옵니다.

여러분의 신앙 여정 속에 이 사실을 빨리 깨닫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 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어떤 분들은 불편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헌신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아는 분에게만 나를 믿고 의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술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고 또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작품을 만든 작가입니다.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1)바울이 사울의 이름을 살 때에 그의 고백대로 그는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하여 훼방자요 포행자요, 핍박자였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였습니다. 그는 어떤 환한 빛에 의해 눈이 부셔 도무지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4-6)

이때 바울이 깨달은 것은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삶을 주님께 바치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자랑해도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추한 자인 것을 압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하나님이 그런 나를 아시면서도 나를 부르셔서 자신의 사명을 맡겨주시니 이 사랑에 감격하여 더욱 죽돈?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2)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의 친구를 예수님께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는데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인 날 수 있느냐”며 예수님을 만나는데 부정적이었지만 빌립의 강권에 이끌려 예수님에게로 나아오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시며 “이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니 나다나엘이 “나를 처음 볼 건데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고 말하자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인 ‘바돌로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을 예고해 주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기 위하여 구별했다고 합니다.(1)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나를 아시는 분이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러브 콜을 하시는 것입니다. 혹 모르고 나를 부르신다면 무엇을 속이고 시집을 가는 처녀처럼 불안하겠지만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나를 불러 따로 구별하셔서 주의 백성 삼고 사명을 주시니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주께 나아갑시다.



2. 하나님이 나를 세우실 때 아이라 핑계하지 맙시다.(6-7)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그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실 때, “할렐루야, 아멘”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반응을 보십시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이 말은 “하나님 잘못 짚었습니다”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어서 하는 그의 말이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에 아이라는 말은 연령이 어리다라는 말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길 그 일을 감당하기에 자격이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선지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사람인데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첫째 나는 말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실 때에 우리의 입에서도 자주 나는 못한다는 말을 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신앙이 어리다는 것입니다. 어리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립니다.



이런 반응을 나타낸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섬기는 자들 가운데 정 반대의 두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정말 준비가 안 되었는데도 자꾸 직분에만 욕심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물론 때로는 직분이 영적 성장의 자극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단체에서 자격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주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가능한 좀 기본적으로 교회에 정착을 하고 난 뒤에 직분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정착하는 일 전에 섬기려고부터 합니다. 그런 사람의 경우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이젠 직분이 주어졌으면 충성 봉사해야 할 때인데도 예레이야처럼 ‘나는 아이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는 먹는 것만 있다고 성장하지 않습니다. 마음껏 활동할 수 있을 때에 정상적이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봉사는 우리의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인 사명으로 부르시면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믿고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고난의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복음과 고난을 받기고 작정하고 뛰어들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딤후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자격이 되어 섬기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기 이 자리에서 설교를 하는 저부터 그렇습니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고백해야 하는 것은

1)나는 충성되어서 직분을 받은 자가 아니라 충성되이 여김을 받아서 직분이 주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2)나를 능하게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느 정도로 준비가 된 사람이냐면 웬만한 집사님들 정도이면 중국에 교회를 하나 맡은 지도자 정도의 실력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미 듣고 배우고 따라 하고 다니면서 익힌 것이 보통 공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믿고 따라가는 결단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지 않으면 쓸모없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 자산은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부자는 어떤 부자인지 아십니까? 은행에 돈 가득 쌓아 두고 써 보지 못하고 죽음 부자입니다.



더 이상 아이라고 핑계하지 맙시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1800년 대말과 1900년대 초에 이 조선의 땅을 밟은 선교사들은 거의 다 20대의 나이였습니다. 그 중에 20대 초반의 나이로 자신을 드린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 1,000만 명이 넘는 성도의 씨앗을 뿌린 자들입니다. 20대 초반의 그 어린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린 소년의 헌신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어리다고 말하지 맙시다. 우리의 신앙이 어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리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할 때에는 이제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이 세우시면 함께 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8)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하나님은 사명을 주시면서 그냥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항상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8절 말씀에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위기의 순간이 오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고 보고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할 때에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을 거셨습니다. 8절 마지막에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리가 완벽하지 못한 일군이라는 사실은 주님의 마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마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고전1:27-28)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혼자 보내시지 않습니다. (눅 10: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예수님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사역을 원리를 고백하셨습니다.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연약한 자식에게 부모의 마음이 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약한 자가 아니라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에 던지면 가라앉는 돌도 나무에 함께 달려 있으면 같이 뜨는 것처럼 우리 혼자는 이 세상 가운데 무력하지만 주님의 능력이 이 세상에서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주신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작정할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분명 나타날 것입니다.



마28장에, 주님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시고 싶은 하나님은 임마누엘을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이제 성령으로 우리와 영원히 임마누엘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맺으면서 - 카자흐스탄 선교사 훈련 이야기

예)선교사이야기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부르신 하나님의 부름에 나 자신을 드리기만 하면 그분의 열심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 아 멘 - (주후 2006-04-23)
주일오전예배 목록
번호 설교제목 설교자 설교본문 설교일자 조회
245 깊은 곳에서 부르짖나이다 시편 130:1~8(구약899) 2006.07.23 708
244 바울의 유언 디모데후서 4:6~13 (신약P346) 2006.7.16 783
243 "주일 - 천 날보다 나은 하루" 시편 84 : 1 - 12 (구약p 864) 2007.07.09 734
242 보리 추수 때 돌아온 여인(※맥추감사주일) 룻1:19-22 2006.07.02 1207
241 "영적 성장의 필요성" 히브리서 5 : 11 - 6 : 2 (신약 p357) 06.06.26 527
240 수가성 여인의 전도 요한복음 4:27~30, 39~42 (신약P148) 2006.06.18 1101
239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요4:27-38 2006.06.11 858
238 어떻게 전도해야 합니까? 단 12:3 (구약1254) 2006.06.04 885
237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 창세기 2 :18~25 (구약2) 2006.05.28 1057
236 어게인(Again) 1907년 예레미야애가5:21 2006.05.21 738
235 부모와자식의 화책 말라기 4:5-6 2006.05.14 816
234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이 사무엘상 3:19~20 (구약413) 06.05.07 482
233 난관을 이기는 성공적 인생 창세기 41:37-45 2006. 4. 30 693
열람중 "내가 너를 세웠노라" 예레미야 1: 1 - 10(구약 p 1050) 2006.04.23 1216
231 부활에 관한 천사의 세가지 메세지 마28:1-10 2006. 04. 9 768
게시물 검색

장산교회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