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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앞에 섰을 때
  • 날짜 : 2006.3.19
  • 본문 : 성경> 출14:10-14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홍해 앞에 섰을 때

성경> 출14:10-14

찬송> 46, 188, 342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는데 홍해 앞이라니?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고난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도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겪고 난 뒤의 고난이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나 일부러 고난을 찾아가는 사람은 특별한 목적을 두고 수도를 하는 사람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난이 올 까 봐 두렵습니다.

고난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할 길이 없는,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는 막막한 상황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완전한 암흑천지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난은 삶을 포기하게 하고 자살까지도 하게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여유롭게 바다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 바다는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로 막고 있는 최대의 장애물입니다. 그들은 급하게 도망 나온 노예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뒤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뒤를 애굽의 군대가 추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자기 나라를 뒤 엎는 재앙을 견디지 못해 할 수 없이 이 노예 노동력을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이 애굽 땅을 빠져나가자 곧 바로 추격한 것입니다. 진퇴양난이란 말이 가장 적절하게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10절.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런 꼴이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시킨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여기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13:21에는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은 결과가 이렇다는 말입니까?

불안을 불평으로 불평은 불신으로 바뀝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의 깊숙한 곳에 들어갔을 때 했던 고백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23:8-9)



부르짖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부르짖지 말라고 해도 부르짖게 되는 거지요. 두려움은 기도하게 만듭니다.(10절. -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런데 기도 따로 불안 따로 입니다.

실제로 고난 가운데 들어가면, 온갖 생각이 다 듭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도 때론 별 수 없습니다. 의심이 꼬리를 물면 사단은 그 의심으로 우리를 잡아 먹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럴 수는 없지?’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럴 수는 없지.’로 바뀌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11절. “(출 14:11-12)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위에는 광야와 산이 둘러싸여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죽이려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섭게 달려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 가운데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1. 곧 바로 불평하기보다는 기다려 봅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단점 중의 하나는 이전에 경험했던 구원의 은혜는 현재의 시련 앞에 맥을 못 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과거에 몇 번이나 우리를 구원해주셨던지 간에 새로운 시련이 닥치면 그 은혜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할 때 정말 전대미문의 기적적인 재앙 속에서 보호를 받았던 백성입니다. 그것을 체험하고 또 그 땅을 나온 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홍해 앞에 서자 그들은 바로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부끄럽지도 않았을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너무 조급함으로 기다립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때까지 변경하려고 합니다.

13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하는 말은 백성들이 취할 행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세가 명한 것은 불명 불만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가만히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14절에는 또 다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싸워주시지 않는다.’ ‘가만히 서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싸우실 틈도 주지 않고 내가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하고 또 내가 해도 안 되거나, 내가 결국 할 것이 없으면 불안, 불만,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전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기회를 주지도 않고 말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은 얼마나 급합니까? ‘빨리빨리’문화가 우리의 기다림의 신앙까지 무너뜨렸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해결될 것인데 조금을 더 기다리지 못해 일을 그르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면 마음은 콩닥콩닥 거려도 행동은 느긋한 편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까지 짧은 인생과 목회 경험을 하면서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건 신앙이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행동의 고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의 80%는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일을 해결해 보겠다고 나섰을 때는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복잡하게 되고 일은 더 수습할 수 없이 커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면 이래저래 알아보려고 하지 말고 좀 가만히 있으십시오. 이리저리 전화하고 뛰어다니며 알아보면서 일은 더 커집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게 죄인인 인간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일이 커지면 커졌지 해결되는 법이 없습니다. 문제를 하나님께 안겨 드릴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보십시오. 그들은 12절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불평을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불평을 하게 됩니다. 술을 처음 배울 때 조심하라며 하는 말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술을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조금 취하면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 사람이 술맛을 알고 마실 대는 제 1단계뿐입니다. 술이 술을 마실 때부터는 술맛은 모릅니다. 나중에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것은 일종의 중독입니다. 이미 술이 그 사람을 집어 삼켜버린 것입니다. 불평 역시 불평을 하다보며 불평이 불평을 낳습니다. 나중에는 불평이 나를 완전히 점령해서 불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마 하지 못할 말을 한 것입니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하나님이 죽겠다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그들을 특별한 역사로 그들을 출애굽시켜주었더니 이런 배은망덕한 말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애굽 사람의 종이라도 좋으니 광야에서는 죽지 않으련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광야에서 죽을지언정 애굽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노라’라고 외쳐야합니다. 한번 출애굽했다면 영원히 출애굽입니다.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이미 그곳은 우리가 더 이상 있을 곳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홍해 앞에 섰을 때 가만히 서서 주가 하나님 되심을 기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문제를 보기보다 하나님을 봅시다.

문제를 바라보면 두려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면 담대해집니다. 딤후1:7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 이스라엘 자손은 눈을 들어 자기들 뒤에 바짝 따라온 애굽 군대를 보았습니다.(10)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은 애굽 사람들에게 가 있었고, 그 결과 그들은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입니까? 모세는 애굽 사람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에 대한 다양한 답을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을 보게 하지 못하고 문제에 집착하게 함으로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시험이 든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16:23)

여기서 사단이 성도들을 어떻게 넘어지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 - 사단은 예수님 앞에 서서 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그렇게 되면 발생한 문제를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지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이 역시 처음에는 내가 문제를 다루려고 했는데 조금 더 진행되면 문제가 문제를 다루고 있고 나중에는 문제가 나를 가지고 놀고 있게 됩니다. 즉 문제 속에 파 묻혀 도무지 길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있으면 문제 때문에 실족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때문에 더 신속하게 가게 됩니다.(♬찬503장 -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다윗처럼 심각한 위기에 처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에서 구원을 얻고 했던 다윗의 찬송은 이러하였습니다.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소망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62:1;4)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의 결단은 히브리서 기자의 촉구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가족 성경공부를 하고 난 뒤의 결단의 찬송으로 부르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찬송의 3절,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3) 뒤돌아서지 않겠네”는 새가족의 결단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세상을 보지 않고 십자가 보며 살아갈 결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나선 믿음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뒤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3. 이해를 하려하기보다 그냥 믿고 나갑시다.

믿음의 세계에 내가 들어섰다는 것은 나의 머리를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 펼쳐진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왜 우리가 출애굽 잘 해 놓고 여기 광야에서 죽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까지 허락해 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바에야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더 낫지. 하나님이 자신들을 극적으로  출애굽시켜 주신 것은 결국 더욱 극적으로 죽이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출애굽까지 시키셨다면 여기에서도 길이 있을 것이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는데 그렇다면 여기에도 길이 있을 것이다. 단지 내가 그 길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믿고 잠잠히 기다린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는 이미 답을 가지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믿었습니다. 이해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믿는 것입니다. 왜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다 밑에 있었습니다. 그 누가 바다 밑이 길이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혹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면 모르지만.

우리는 상황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전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제 3의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냥 결단이요 위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을 떠날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8) 이어 그는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9)

믿음의 세계는 알고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믿고 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믿기 전에는 그의 안다는 것은 그냥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을 때 그의 모든 지식은 신앙이 됩니다.



때로 하나님은 죽음을 담보로 한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죽기로 작정한 믿음을 가졌을 때 급하게 부르시며 수풀에 걸린 양을 보게 하시고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맺으면서 - 위기는 곧 기회!

'위기'라는 뜻의 영어 '크라이시스(crisis)'는 그리스어의 '크리네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크리네오'는 '나누다, 선을 긋다'라는 뜻으로써, 뚜렷한 획을 긋는 분기점, 혹은 갈림길 등을 나타낼 때 쓰던 말입니다. 그래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crisis를 'turning point for better or worse' 즉, '좋아지거나 혹은 나빠지게 되는 전환점'이라고 해석해 놓고 있습니다. 한편 동양에서는 위기를 '危機'라고 표기하는데, 이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를 동시에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기를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기란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나빠질 수 있는 위험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좋아질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홍해 앞에 선 것과 같은 인생의 위기에서도 가만히 서서 하나님만을 바라보시고 믿음의 결단과 위탁을 통하여 더욱 깊은 신앙의 자리로 나가가게 되는 신앙의 터닝 포인터로 삼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주후 200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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