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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신령과 진정(진리)의 예배
  • 날짜 : 2006.03.5
  • 본문 : 요한복음 4:21-24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신령과 진정(진리)의 예배

성경> 요4:21-24

찬송> 40, 138, 53



●들어가면서 - 외로우신 하나님?

성도 여러분, 요사이 가끔은 제가 외로움을 탑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이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목사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목사도 사람이니까요? 사람이 외롭다고 여길 때는 혼자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는 집에 가면 아내가 있고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고독은 그의 아내도 그 가족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목양실 책상에 앉아서 속으로 “하나님, 나는 혼자입니다.”라고 외치니 더욱 서러운 생각이 듭디다. 하나님께 이런 마음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위로 좀 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게 하시는 말씀은 “나도 혼자일 때가 많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왔는데 하나님이 혼자이시다니요?

성도 여러분, 요사이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한국영화역사를 또 새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쯤이면 최고의 관계 동원기록을 세울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의 1/3이 이 영화를 봤다는 말입니다. 통계에는 어린아이부터 나이 많은 노인들까지 다 들어있으니 젊은 층의 사람들은 거의 다 봤다는 말인데 여러분은 보셨습니까? 저는 아직 못 봤는데 비디오 나오면 교회에서 프로젝트를 통해 단체 관람 한 번 하십시다. 그런데 대강의 줄거리는 매체를 통하여 압니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연산군은 그를 위하여 존재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고독한 남자였는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사실은 왕을 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 예배의 시간에 나와 있지만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오직 나 자신을 위할 뿐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예배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한다고 하는 예배 가운데서도 고독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미국에 흑인이 주일날 백인들이 주로 사는 마을로 급하게 볼 일을 보러 갔다가 그곳에서 주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교회를 갔더니 안내위원이 교회당 입구에서 이 교회는 흑인들 출입금지니 다른 곳에 가 보라고 막더라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다른 교회를 찾아가도 거부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 분하고 쓸쓸한 마음에 공원을 찾아 혼자라도 예배를 드릴까 하여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는 서러워하며 혼자서 울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그 기도를 듣고서는 나와 같은 신세군요 나와 함께 예배드립시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흑인이 그 사람을 바라보며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예수입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예배 드리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른 예배, 온전한 예배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가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으로 진정한 예배자라는 제목으로 불과 몇 주 전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의 여인과 대화하신 내용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인생을 다 알고 있는 예수님께 선지자라고 말하면서 예배 문제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20절에 자신들 즉 사마리아인들의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것이 맞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산이나 예루살렘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예배자의 예배는 어떤 예배인지 답을 얻게 됩니다.

23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예배하는 자가 아니고 참으로 예배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참 예배, 진정한 예배에 대한 기대가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또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시니 진정한 예배자들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인의 예배 - 진리 없는 신령

그러면 그 당시의 예배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예배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사마리아인들이고 또 다른 부류는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22)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사마리아 인들이 예배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이 예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기에는 부족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열광적이고 흥분되고 또 충성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올바른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령으로 예배했지만 진리로 예배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성산으로 알고 있는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은 BC 125년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겨우 400 명 정도의 사마리아인들만이 생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일에는 그리심산으로 가면 모세의 울법 시대에 했던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동물들의 배를 가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충성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열광적이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신령으로 예배했지만 진리로 예배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예배 - 신령 없는 진리

이제는 유대인들의 예배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유대인)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22b)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에 비해 구약 성경 39권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사마리아 인들에 비해서는 구원의 가르침이 더욱 풍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식은 구원의 풍성함으로, 진정한 예배자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타난 정통 유대인들이며 성경의 지식에 능통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해 잘 압니다.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식적이며 율법적이며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더욱 철저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요소요소 필요한 것을 빼먹지 않는 완벽한 순서를 가진 예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전혀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예배의 문제는 바로 진리는 있으나 신령이 없는 예배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그리심산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진리)이 모두 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 - 신령과 진리가 함께 있는 예배.

우리가 참으로 예배하려 할 때에는 신령과 진정(진리)이 모두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 이 신령과 진정이 적당한 비율로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100%의 참 예배를 드리려면 50%의 신령과 50%의 진리가 모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참 예배의 정신은 100%의 신령한 예배, 100%의 진리의 예배를 지향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예배는 완벽한 말씀의 터 위에서 나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이와 같은 예배를 드린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가장 가까이 하셨던 친구 나사로의 가정의 누이 마리아입니다. 이 마리아의 기사는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나사로의 가정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엄청나게 비싼 향유를 가져와서 먼지가 가득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 당시 귀한 손님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면 종들을 시켜 대야에 물을 떠와서 손으로 발을 씻겨주는 것이 예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약 2-3천만원 정도 되는 값진 향유를 물대신 예수님의 발에 부었고, 손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당시 이런 향유 옥합은 어머니가 딸의 혼인 때를 대비해 예비하였다가 물려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는 의미로 이 행위를 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다 드리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녀는 신령으로 예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 행위는 단순한 감정적인 행위만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을 예수님께 다 드린 것은 철저한 지식(진리)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지만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접대도 중요하게 보시지만 그의 발아래에서 맑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면서 말씀에 빠져든 여인을 더욱 귀하게 보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말씀을 경청하던 여인이 순전한 나드 한 근이 든 옥합을 주를 위해 깨뜨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그렇게 파격적인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왜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여인이었기에 즉, 진리에 거하는 여인이었기에 그녀에게서 그와 같은 헌신은 가능한 것입니다. 정확한 지식, 진리에 신령이 나오는 것입니다.(예- 남녀의 사랑 역시)



이 같은 예배가 신령과 진정(진리)의 예배인 것입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요12:3에는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예배는 구약 시대의 제단의 향처럼 올려져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출30:34-38에는 우리의 예배가 향으로 올려져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의 예배에 대한 소중한 부분을 알려줍니다.



(출 30:34-38)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36]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37]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38]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실제로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향이었던 이 향료는 성막 안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거룩해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37-38절은 “ [37]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38]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성도 여러분, 성경에 향 처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향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위해 그것을 만든다면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생명이 끊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향은 무슨 향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만을 위해 고안된 향이었습니다. 이 향이 하나님의 코에 닿았을 때, 그것은 그에게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제게 향수를 선물해 줍니다. 그런데 저는 향수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그 향이 싫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향들이 너무 셉니다. 그런데 최근에 외국을 갔다 온 분이 제게 향수를 또 하나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대하지 않고 향을 맡았는데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향이 제게는 참 좋았고 상쾌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넥타이 안 쪽을 조금 뿌리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향이 있다는 것은 예배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코에 닿는 독특하고, 분리되고, 정제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가장 거룩한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으로 드려진 향이 마리아를 통하여 나타났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그대로 받으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이 행한 것을 말하여 기념하라”(막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위한 향을 만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위한 향을 만들어 올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행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배를 그 어떤 존재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자발적인 그리고 자의적인 예배는 우리 인간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이제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맙시다. 우리의 예배가 어떤 예배인가를 봅시다.

이제 우리는 예배를 다시 리모델링합시다. 예배에 나올 때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나와 있는지를 봅시다.

우리가 가장 억울하게 여겨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예배에 나오기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만큼 예배는 귀하고 위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자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에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른 예배를 드린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 교회의 예배에는 치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축복이 넘쳐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바로 이 예배시간에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른 예배자에게 주어지는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우리 자신의 예배를 다시 세우고, 우리 교회의 예배를 다시 세웁시다. 그리하여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분명하게 발견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주후 200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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