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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생애와 다윗의 생애
  • 날짜 : 06.02.19
  • 본문 : 사무엘상15:17~29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복 있는 사람

성경> 시1:1-6

찬송> 50, 219, 395



●복 받기 원하는 사람

한국 사람에게 가장 가깝게 여겨지는 단어가 있다면 ‘복’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새해 첫날에 인사는 “복 많이 받으세요.”입니다. 전통기구에는 복 복자를 온데 써 놓았습니다. 신혼살림의 이불에도 복, 베게에도 복, 숟가락에도 복, 거울에도 복. 그래서 복을 퍼 먹고 덮고 베고 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제일 첫 장, 첫 머리에서 ‘복 있는 사람은~’하며 시작을 하고 있으니 다른 어떤 성구보다 더욱 관심이 가게 됩니다. 시편 제 1편은 시편 전체를 여는 문과도 같습니다. 즉, 시편 전체의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성경 전체의 요약과도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 복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1)

1절. “복 있는 사람은 …아니하며 …아니하며 …아니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1)악인의 꾀를 좇아가면 안 됩니다.

여기에 ‘꾀’는 ‘사상’, ‘생각’, ‘가르침’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악인은 험상궂게 생기고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상해를 입히고 죽이기까지도 하는 조폭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악인은 세상의 사상과 생각과 가치관으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그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주장하고 그렇게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악인의 주장에, 가치관에, 삶의 방식에 성도들이 미혹이 되어 좇아갑니다.



하나님 백성은 세상 사람과 근본부터 다릅니다. 그래서 거듭나게 되지 않았습니까? 거듭났다는 말이 ‘위로부터 났다’는 뜻입니다. 하늘로부터 난 것입니다. 영적인 탄생이 이루어진 자들입니다. 땅에서만 난 자들, 육체로만 난 자들과는 다릅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행동도 달라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은 자신의 꾀를 주입시키고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일단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 하나님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꾀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하다가는 아이가 대학도 못 들어가고 실패와 낙오자가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것에 성도들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켜봅니다. 나중에는 그게 하나님의 뜻인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그냥 세상이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할까봐 그게 걱정입니다.

젊은이들의 성의식에 대한 조사를 보고 놀랍니다. 2-30대 미혼여성을 조사한 결과 혼전성관계를 반대하는 사람은 20%밖에 되지 않고 이미 36.4%는 성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한 2004년 12월에 신문에 난 통계수치입니다. 세상의 이런 세태는 또 얼마나 우리의 젊은이들을 미혹할런지요? “이미 순결을 지키던 시대는 지났다.” “살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 사람을 믿고 일평생을 살겠느냐?” 그러다 구체적인 유혹이 올 때에는 “다들 그렇게 하고 사는데 나만 이럴 필요가 있는가?” 하고 자신을 그냥 내 줘 버리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로하신 어른들은 건강이 가장 큰 관심입니다. 건강에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 )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안 만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좇아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바로 이들을 좇아가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의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빌3:20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파견되었을 뿐입니다. 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향을 잊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야 할 나라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강요하는 모든 것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복은 멀어져 간 것입니다.



2)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

1절 말씀은 악인의 꾀를 좇아가는 사람에게 이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행동양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의 꾀를 좇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곧 더 나아가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될 것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이제 그 사람의 행동이 우연히 행한 악한 행동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고의적으로 한 것이며 그의 오만한 행동은 습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번 악인의 꾀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내는 일은 더욱 쉽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며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마12:34) 잠23:7에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세상이 주는 그런 영향을 이겨내고 복 있는 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어지는 2절 말씀에 그 답이 나옵니다.



2.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가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라면) 두 번째 것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2)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악인의 꾀를 좇아가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여호와의 율법으로 채우는 자입니다. 그의 마음이 악인의 꾀로 인해 미혹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게 하는 자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악인의 꾀가 지배하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게 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는 자는 말씀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봐야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대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대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의 율법이 즐겁습니다. 그 즐거움은 밤낮 구별이 없게 하였습니다. 말씀은 항상 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냥 읽지 않고 묵상을 합니다. 깊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씹고 또 씹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뵈레아교회 성도들처럼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상고하는 것입니다. 깊은 묵상은 말씀의 살아있음을 체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문자 속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지금 말씀하고 있는 분으로 느낍니다. 히4:12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말씀처럼 이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체험적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악인의 꾀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악인의 꾀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꾀, 인간의 사상과 세상의 가치관을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의 깊음에서 오는 맛과는 비교할 수 없기에 악인의 꾀는 전혀 무가치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읽는 데도 대단한 결심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심도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작심삼촌?) 그러다가 더 강력한 악인의 꾀에 맥없이 쓰러지고 맙니다. 그 다음에는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게 됩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가 됩니다. 진정 우리가 복 있는 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한다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않으려는 노력과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욱 더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채워지면 다른 것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7귀신을 더 데리고 온 귀신.)



3.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3-4절을 통해 그림을 떠올리게 하며 1-2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시 1:3-4)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무엇과 무엇이 비교 되고 있습니까? 나무와 겨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너무나 엄청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과 열매가 맺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1)악인은 겨

겨는 곡식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알갱이가 사용될 때면 겨는 버려지는 것입니다. 곡식의 한 부분이지만 결국 쓸모없이 버리는 것이 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겨냥 겨가 아니라 ‘오직 바람에 나는 겨’입니다. 겨는 바람이 불면 날려가고 흔적도 없게 됩니다. 왜? 그것을 지탱해줄 무게도 없고 뿌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삶이 곧 겨와 같다고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악인의 삶은 그 속에 뭔가 있을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기루와 같습니다. 화려해 보이는데 실제로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추하고 더럽습니다.

세상의 꾀를 좇아 죄인의 길에 서는 것,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겨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영향 속에 자신을 방임하며 사는 것은 곧 겨와 같은 인생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반면에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자의 삶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내는 복수로 나무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시내가 하나의 나무를 위해 존재하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이 얼마나 풍성한지 이곳저곳에 널려 있어 한 나무를 위해 공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깊은 묵상이 얼마나 풍성한 삶으로 인도해 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무에도 바람을 불고 벌레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성구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예레미야 17장 8절에는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더위도 두렵지 않고 가무는 해도 걱정이 없다고 합니다. 즉, 환난이 없는 것도 아니며 고통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풍성한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또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시절을 좇는다는 말은 때에 맞게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열매를 필요로 할 때에는 항상 열매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의 위력은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무는 날에는 그 위력이 나타납니다. 나무 모든 나무는 말라비틀어지는데 그 사무는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청청한 잎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사람 역시 평소에는 그 진가가 나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환난이 닥쳐올 때 말씀의 사람의 위력은 나타납니다.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그 자리에서 이전과 다름없이 든든히 서 있습니다. 열매가 필요할 그 때에 결정적으로 그는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는 사람이 점점 더 패망의 길로 가는 것과는 달리, 그는 점점 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게 됩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닮아가게 된 것입니다. 기쁨도 주님과 나누고 슬픔도 나누면서. 어떻게 말씀 속에서.

예)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 -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 바위와 대화를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맺으면서 -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 둘 중의 하나

-아 멘-(주후 200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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