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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 실은 벧세매스 암소처럼"
  • 날짜 : 2006.02.05
  • 본문 : 사무엘상 6:10-21(구약416p)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법궤 실은 벧세메스 암소처럼

성경>삼상6:10-21

찬송>202, 351장



●들어가면서 - 사건의 개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 중에 이런 의문을 가져 본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렇게 엄격하신건가?”

“다른 사람들에겐 관대하신 것 같은데 나에겐 왜 이렇게 일일이 간섭하시고 조금만 잘못해도 바로 징계하시는 건가? 심지어 불신자는 죄를 짓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가만히 놔두시는데 나는 조금만 잘못해도 가만 두지 않으시는가?”



오늘 하나님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답과 아울러 이렇게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사사시대 말기, 이스라엘이 극도로 혼란하던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이 이라는 인물이 이스라엘에 점점 부각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대패하고 당시 대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합니다. 더욱 불길한 것은 여호와의 언약궤(다른 말로 법궤)를 빼앗겼다는 사실입니다. 언약궤는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들의 전사 소식과 언약궤의 탈취당한 소식을 들은 당시의 대제사장 엘리는 충격을 받아 넘어져 죽습니다. 이어 이 소식은 그 당시 임신해 있던 엘리의 며느리(비느하스의 아내)에게 소식이 전해집니다. 며느리는 남편과 시부의 사망소식 더 나가 여호와의 궤 소식을 들으면서 이 임산부는 고통 중에 해산을 하면서 죽습니다. 죽어가는 이 여인에게 사람들이 위로의 말로 “네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말해주지만 이 여인은 그 말에 대해서는 대꾸도 하지 않고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아이 이름은 이가봇이라 하라”고 하면서 숨을 거둡니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남. 이 말 한 마디가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을 집약해서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블레셋에서 일어납니다. 법궤(언약궤)를 빼앗아간 블레셋에 여러 가지 재앙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빼앗은 언약궤를 아스돗이라는 마을로 가져가서 그들의 섬기는 다곤신의 신당에 둡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다곤 신상이 땅에 떨어져 머리와 손목이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또 아스돗 사람들에게 악성 종기가 발병해서 번져 가는데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 끝에 언약궤를 가드라는 도시로 보냅니다. 이젠 가드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곳에서도 악성 종기가 사람들에게 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다시 에그론으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언약궤가 에그론에 도착하자 에그론 주민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 저주스런 물건을 왜 우리 도시로 가져오느냐 우릴 죽이기로 작정했냐며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은 결국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6장은 법궤를 돌려보내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종교담당 관부들에게 어떻게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보내면 되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첫째,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보낼 때 새 수레를 아직 멍에를 매어 보지 않은 젖나는 암소에게 메도록 해서 그 수레에 언약궤와 제물을 실어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물로 금으로 악성종기 형상을 다섯 개를 만들고 또 그들 생각에 악성 종기를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쥐의 형상을 금으로 다섯 개 만들어서 언약궤와 함께 실어 이스라엘로 보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블레셋 지도자들의 대단한 테스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건 여호와라는 이스라엘의 신에 대한 테스트입니다. 그건 “과연 블레셋에 일어난 재앙이 이스라엘 신 여호와가 한 일인가?”하는 것입니다.

9절.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이건 모든 사람들의 심리 가운데 있는 요소입니다. ‘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이 노해서 일어난 일인가?’를 알고 싶은 심리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테스트 장치로 설정해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젖나는 소입니다. 새끼를 갓 떼어낸 젖나는 소입니다. 과연 막 새끼를 낳은 이 소가 아직 젖이 불어 있는 상태인데 새끼에 연연하지 않고 여호와의 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의 방백(지도자)들은 이 소를 따라 마지막 지점까지 따라갔습니다.

12b.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16절.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의 다섯 도시의 대표자 방백들은 모든 것을 다 확인 한 후에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난 뒤에 받은 느낌은 무엇이겠습니까?

1번, 정말 좋았다. 2번, 실망했다. 제가 생각하는 답은 1,2번 모두입니다.정말 좋았다는 것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무사히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넘어갔고 그 결과 재앙도 멀리 갔다는 것입니다. 실망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이 정말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즉 화근은 자기의 땅에 없앴지만 더욱 무서운 이스라엘 신을 확인한 테스트였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신을 우습게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이 훨씬 더 강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쟁에 그들이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그들의 신당 다곤신당에 언약궤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블레셋이 강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범죄했기 때문에 블레셋이 승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여전히 살아계심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블레셋의 이런 테스트에 응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신 방법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수레에는 법궤를 실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실은 암소, 그 소는 단순한 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는 소입니다. 이 소는 하나님을 모시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암소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올곧은 믿음의 길에는 끊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12)

정말 이 암소에게 주어진 임무는 가혹한 임무입니다. 새끼를 낳고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소입니다. 그런데 새끼를 억지로 떼어놓고 법궤 실은 수레를 끌게 한 것입니다.

사실 블레셋의 방백들이 행한 테스트는 불가능한 시험입니다. 그것은 본능에 대한 도전과 같기 때문입니다. 12절의 내용에는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첫 번째 것이, “갈 때에 울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장은 “바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라는 단어입니다.

새끼를 뗀 어미 소가 새끼가 생각이 나서 울었다면 그 소는 곧바로 좌우 치우침이 없이 갈 수 없습니다. 젖이 불어 있는 이 소는 새끼 생각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웁니다. 그렇다면 이 어미 소는 가던 길도 돌아서야 하고, 할 수 없이 끌려간다 하더라도 끌려가면서 적어도 계속 뒤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소는 누가 끌고 가는 것도 아닌데도 새끼가 그리워 울면서도 곁눈질도 하지 않고 그 길을 곧바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증거는 이뿐 아닙니다. 이 어미 소가 멈춘 곳입니다. 그곳은 유대 땅 벧세메스라는 곳입니다. 벧세메스는 가나안 정복시대에 제사장들에게 할당된 유다 지파의 한 도시였습니다. 법궤가 가야할 곳에 제대로 간 것입니다. 마치 이 소가 법궤를 다루는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안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길이 좌우 치우침이 없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끊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끊어야 할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본문의 상황에서는 바로 인간의 정일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소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모시고 신앙생활의 길을

떠난 자입니다. 신앙생활에 곁눈질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지 말고 묵묵히 가야합니다.

법궤를 싣고 갈 때에는, 즉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상 인정(人情) 곧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정(情)마저도 끊을 때는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론 울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울면서도 갈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 큰 소의 눈에 눈물이 일렁이면서 “음메”하고 울며 수레를 끌고 가는 어미 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혹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며 자신의 부친을 장사를 치르고 따르게 해 달라고 하셨을 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갈릴리 어부출신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 그들은 배와 그물만 아니라 그들의 부친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 기록하고 있습니다.(마4:22)

필리핀에 갔었던 아이들이 돌아오기 하루 전날에 심방을 하면서 그 아이들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집사님이 우리교회가 후원하고 있는 성경번역선교사로 인도네시아 파푸아 섬에 가 있는 독신 선교사, 김소현 선교사님에 대해 말씀을 하였습니다. 부모로서 자신의 딸이 선교지에서 이런 공부하고서 나중에 선교사로 간다고 한다면 정말 자신 없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선교사님의 부모님을 잘 압니다. 몇 달 전에 우연히 그 분의 부친을 만났는데 그 분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칠십 세가 된 집사님입니다. 아직도 후원비가 모자라는 딸의 후원비를 보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산대학에 강의 자리가 났는데 그렇게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가기 전에 항상 입만 열면 아버지, 어머니 죄송하다는 말이었는데, 부모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없이 국내에서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데… 그렇게 간 딸이 이해가 되지 않고 한편으로는 야속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가장 기초적인 부모와 자식의 정도 끊는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서울에 사랑방 교회가 있습니다. 좀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사모님의 글이 그 교회의 주보에 실렸습니다. 일년 치 주보를 책으로 만들어 매년 발간하는데 그 속에 그 교회 사모님의 글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학생들이 강원도에 수련회를 갔다가 물놀이 중에 한 아이가 익사한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누구인지 말을 해 주지 않아 급한 마음에 현장을 가보니 다른 아이가 아니라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교회 개척 시기며, 이 고생 저 고생 말이 아니었는데 이제 또 하늘이 무너지는 이런 일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이어 미움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6개월을 교회에서 사모 위치도 못 지키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자식에게 너무 얽매여 있는 자신을 하나님이 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생을 하다 살다보면 자식들에게 거는 기대가 커지지 않습니까? 교회 개척 시절부터 너무 어려운 길을 걷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자식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아이를 데려가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죽은 아이가 다른 아이가 아니라 목사의 아이임을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아이가 죽었다면 그 성도의 부모에게 평생 고개를 못 들고 살 것인데 목사의 집 아이가 죽은 것이 감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너무 많은 인간의 정에 매여 하나님의 법궤를 매지 못할까봐 하나님은 그것을 떼어 내게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방백성과는 다릅니다.(19)

사실 블레셋이 법궤를 보낸 방법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혀 율법의 규정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언약궤 운반에 대한 규정은 제사장들이 직접 메고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민4:15) 인격체도 아닌 짐승에 의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의 받듦 가운데 하나님은 움직이시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의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들이 사용하는 자기네의 방법을 그대로 묵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블레셋 방백들의 기분 나쁜 시험에도 그대로 응하셨습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법궤가 벧세메스에 당도하자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제사장들이 사는 동네이기에 이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할 법궤가 이방인의 땅에 있다가 수레위에 얹혀 소에 끌려오자 기쁨으로 달려와 들여다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그것을 본 70명의 사람들이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어떤 사본에는 오만 칠십 명) 사실 그것은 율법이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보는 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고 민4:2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대조되는 두 사건입니다. 이방인이 법을 어긴 것에 하나님은 너무나 관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긴 법에 대해서는 너무 엄격하셨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봐 주셔도 자기 백성을 더 잘 봐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대우하시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특권을 누리는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도리어 여기에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애착을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십니다.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이 자신의 신을 섬기다가 지옥을 가는 것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롬1:24에 이방백성에 대해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만큼은 챙기시는 분입니다.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다. 징계를 해서라도 고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히12:8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집요하게 우리를 간섭하시고 우리를 징계하시면 감사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곁길로 가고 있는데 여전히 침묵하시면 그땐 내 편에서 겁이 나야합니다.

이럴 때 겁도 없이 용감한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이방인이든지 더 크게 당할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중심은 하나님의 백성만큼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취급하시고 다른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을 집요하게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힘든 것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울며 가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때로 우리는 법궤를 실고 거룩한 땅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혹 우는 일이 있을지라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바른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 아 멘 -(주후 200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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