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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는 선교사가 해야 할 것"
  • 날짜 : 2005.01.22
  • 본문 : 로마서 15:22-33(신약261p)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보내는 선교사가 해야 할 것

성경>롬15:22-33

찬송>43, 264, 265





●선교사와 동역자인 교회(성도)

근래에 와서 우리 교회 성도들이 자주 했던 말 중에, “우리는 왜 삽니까?” “사람 살리기 위해?” “무엇으로?(사람을 살리는 도구는?)” “복음과 빵으로”

이 구호는 우리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야 할 이유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란 것과 그 도구가 복음과 빵이라는 말은 한 마디로 말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가 선교(혹은 전도)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성경 66권의 메시지는 곧 ‘선교(혹은 전도)’라는 한 단어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전도와 선교가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편의상 동질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전도’라고 하고, 타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같습니다. 단지 동족이냐 이방인이냐의 차이입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선교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선교사로 이 세상에 파송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초창기 복음 사역 중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그래서 예수님의 선교사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역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교회가 세워지면서 교회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집사들이 나가 전도했고, 나중에는 대부분의 사도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의 대부분이 선교사로서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선교사역과 관련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 선교역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 생깁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환난을 피해 흩어진 교인들이 전도를 해서 설립된 안디옥 교회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선교사로 파송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선교의 사명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선교사가 되어 타문화권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는 지역에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을 대신해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그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의 결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교회나 단체를 대신하고 대표해서 파송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살기에 직접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접 가지 못하기에 보내는 자들입니다. 선교의 사역은 독단적인 사역이 될 수 없습니다. 가는 자와 보내는 자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가는 자들만 선교사가 아니라 여기에 남아 있는 우리도 선교사입니다. 단지 가는 선교사와 보내는 선교사로서의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보내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1. 계속 타올라야 할 선교의 열정(22-24)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에는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계획은 서바나 즉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로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22절에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로 가려던 시도가 여러 가지 이유로 막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 중에 가장 타당한 이유를 23절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라고 말합니다. ‘이제는’이라는 말을 통해 그 이전까지는 계속 일에 바쁘다가 이제는 그 일이 끝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일이란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고 양육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결국 그가 로마로 가지 못한 것은 당장 눈앞에 있는 복음의 현장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고 또 이들을 양육해야하는데 일꾼은 없고…  로마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이제는 고린도에서 의 사역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지만 또 예루살렘에 가야할 중요한 일이 생겨 곧장 로마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이미 로마를 넘어 스페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서바나는 로마세계로서는 땅 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던 행1:8의 말씀을 바울이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복음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자신이 이 말씀을 이루는 주인공이 되기를 소망하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서바나를 갔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바나를 갔다고 할지라도 그곳이 땅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땅 끝은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시작한 곳으로부터 다시 돌아오면 그곳이 바로 땅 끝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유럽 대륙을 거쳤고 한 동안 로마제국과 함께 있다가 이제는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복음을 아시아 각 나라로 전해주었고 이제 아시아의 한국을 중심으로 회교권인 중동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복음은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곳이 땅 끝인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땅 끝의 비전은 오늘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1600m 마지막 주자로 운동장 한 바퀴만 돌면 세상은 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지 못했던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나고,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던 스페인에 복음의 씨앗이 되기 소망했던 바울의 불타는 구령의 열정이 오늘 우리의 가슴에 다시 피어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에 대한 비전은 어디까지이며 언제까지인가?

나의 삶에 대한, 나의 사업에 대한, 나의 교회에 대한 비전은 어디까지 가슴속에 있는가?



2. 선교와 선교비(24하)

1)당연히 제공되어야 할 선교비

바울은 자신의 선교의 계획을 로마교회에 밝히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4절.

(롬 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나려고 한 것은 로마교회 성도들과 교제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로마교회가 자신을 서바나로 보내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로마교회가 자신의 선교 비용을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숨기지 않고 정확하게 밝힙니다.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요청은 당돌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러나 바울은 당당합니다. 그것은 이 일이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습니다. 파송을 받은 선교사는 파송한 교회와 하나입니다. 선교사의 문제는 선교사 자신의 문제만 아니라 곧 파송한 교회의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문제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자신 혼자 할 수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주위에는 항상 동력자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과 같이 협력사역을 하였습니다. 선교사역에 협력이라고 말할 때 가장 중요한 협력자는 교회입니다. 협력자라는 의미로는 부족합니다. 동역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의 마음에 사심이 있었다면 이렇게 요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난 뒤 그 교회에 자신의 영향력을 심으려 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기에 로마교회가 이 일에 동참할 것을, 특히 물질로 동참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예화)작년(2205)에 7월 중 밤 예배시에 남아공에서 사역하시는 노록수 선교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했던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본인이 박순애전도사님의 집회에 와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은혜로운 교회에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대전의 대덕연구단지에 개척을 하셨습니다. 조금 교회가 성장했을 때 교회부지를 사고 교회당 건축을 시작했는데 크게 힘들었나 봅니다. 그때 이분이 우리 교단신문 기독교보에 도와달라는 광고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전도사 사례 약 15만원이나 받았을까요? 그 중에 7만원을 건축헌금으로 보냈었습니다. 제가 아무 교회나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서 송금해 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신중한 편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다른 것 알아보지도 않고 돈을 붙였습니다.

도움을 요청한 문구에 정확하게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게 나의 일이냐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당돌하기 짝이 없는, 도와 달라는 사람이 읍소하듯 애원하지는 못할지언정 그렇게 해서는 누가 도와주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때 받은 느낌은 ‘이 목사님은 사심이 없이 일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호소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은 것입니다.

그 이후 저의 관심은 그 교회에 멀어졌습니다만 나중에 보니 이 목사님이 교회가 조금 안정이 되자 그 교회를 다른 분이 목회하시도록 하고 남아공에 선교사님으로 가셨더라고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선교사들의 사역비를 담당해야 합니다. 그들의 생활비를 그들의 자녀교육비를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본연의 임무인 선교활동 이외의 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땅히 교회가 할 일이며 보내는 선교사들의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가끔 선교사님들이 도움을 요청하면서 구걸하는 듯한 느낌이 싫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심이 없는 선교사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바로 심사해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후원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이 사역비에 허덕이지 않도록 그들의 사역을 관심이 있게 지켜보며 지원해야 합니다.

매년 도와 달라는 선교사님들은 많고 요청한 선교사님들의 1/3도 도와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선교사님, 당당하게 선교사역의 동참을 요구하십시오. 우리가 힘닿는 데까지 동역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2)선교비는 축복으로 돌아온다.(29; 빌4:17-19)

이렇게 하면 그 교회나 성도는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29절.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이 말씀은 로마교회가 바울의 선교를 도우는 것은 곧 복 받는 일이라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더욱 당당했을 것입니다. 물질을 빼어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받을 일을 만들어 준다는 입장에서 더욱 당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와의 관계에서도 이 사실은 명확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신의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 것을 감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4: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이 말씀은 “내가 선물을 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그것은 너희에게 유익한 과실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18절에 빌립보교회가 물질로 선교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빌4:18b)

더 나아가 이 일에 하나님의 채워주심이 있을 것임을 말합니다.(빌4:19)

결국 선교의 동참은 자신이 것이 소비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욱 큰 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요구는 복을 받을 일을 만들어 준다는 입장에서 더욱 당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빌4:17)

그래서 적극적으로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일선에서 하고 있기에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에 이런 일에 뜻을 두고 헌신하시는 분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3. 기도로 이루어지는 선교(29-33)

1)선교는 곧 기도이다. 그 기도는 구체적인 기도이다.(31절부터 구체적인 기도가 나온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 구체적인 기도를 요청한다.

기도는 바울과 힘을 같이 하는 것이다.(30 - 나와 힘을 같이 하여) 우리가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의 사역에 힘을 같이 하는 것이다.

바울은 편지할 때마다 자신을 위한 기도 요청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편히 쉴 기도까지(32하)

선교사의 안식이 필요하다.

선교사들은 영원한 이방인입니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외국인이기에 이방인입니다. 그렇다고 고국에 돌아와도 마음을 둘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너무 오랜 세월 고국이 바뀌었고 자신의 연고지가 없어지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고국에서도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랜 선교기간동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국에 돌아와도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전하셨던 곽상호 선교사님은 신흥교회가 제공한 오피스텔에 머물고 계십니다.

어느 교회는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자신이 기거하던 집을 교회에 바친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모여 선교사 안식관이 되고 그것이 또 선교기금이 되어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으면서까지 자식들에게 남겨줄 필요가 있습니까?



●선교사의 상에 동참

우리교회의 각종 헌금 명단에 보면 성인 성도들뿐만 아니라 초등학생, 유치부, 심지어는 품 안에 아이들의 이름까지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 선교헌금의 경우가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부모가 적은 금액일지라도 아이들이 자신의 용돈을 절약해서 직접 하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대신해서 내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아이가 직접 자신의 헌금봉투에 헌금을 넣고 기도하고 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동역하는 법을 배워 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행위는 딤전6:19의 말씀대로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보내는 선교사가 해야 할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선교비를 보내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도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선교사인 것입니다.

마10:41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 시켜도 좋을 것입니다. “선교사의 이름으로 선교사를 영접하는 자는 선교사의 상을 받을 것이요”



우리 모두는 선교사의 상에 동참할 자들입니다. 그것은 보내는 선교사이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사, 사람을 살리는 일인 선교사역에 동참하여 복음의 확장에 기여도 하고 복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주후200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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