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교회채널
 가정교회360
 예배생방송

사역의 지경이 넓혀지는 교회

주일오전예배

진정한 예배자입니까?
  • 날짜 : 2006.01.15
  • 본문 : 요한복음 4:19-26(신약149)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진정한 예배자입니까?

성경>요4:19-26

찬송>35, 214, 53



●들어가면서 -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22)

성도 여러분, 저는 설교 중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세상과는 구분된 사람이란 사실을 증명한다.’ 이런 말을 자주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이 자리가 무엇을 하는 자리입니까? 예배드리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배드리기 위해 이 시간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기에 많은 성도들이 지난 주일에도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20, 30, 40년을 주일이면 어김없이 이렇게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때가 되어 천국문에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며 “너는 누구냐?”하고 묻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 우리는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하나님 나 장산교회 교인입니다. 나는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나가 예배했습니다. 주로 내가 앉는 자리는 *줄 *번째 의자입니다. 내 옆에는 **집사가 앉아서 자주 예배를 드렸습니다. 정 모르시겠거든 그 집사에게 물어보십시오.”

억울해 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사실, 나는 네가 말하는 그 집사도 잘 모른다!”



이것은 우리는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예배를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정말 이상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화)초상집에서 어떤 사람이 정말 슬프게 울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누가 죽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때 말하기를 “몰라요”라고 대답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다.

혹 오늘 우리의 예배가 이런 식의 예배는 아닐까요?



오늘 성경본문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에 사는 한 여인이 예배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이런 상황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우리의 예배 상황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에 복음을 전할 계획으로 이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문제가 많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험한 인생을 산 여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볼 면목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을 피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더워 집에서 잘 나오지 않는 정오 시간을 택해 우물에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그렇게 반갑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자꾸 건드리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과거를 잘 아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하며 예배문제로 화두를 옮깁니다.>



20절.

21절.

22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성도 여러분, 이제까지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를 드린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마리아인들이 다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은 사마리아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까지 다 그렇습니다.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나 예배를 드림에 있어 장소를 고집한 것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포기할 수 없는 일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예배를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됩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까?



1. 예배의 목적이 정확해야 합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예배를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오늘의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이 살던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가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목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까?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창 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는 옮길 때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단을 쌓았다) 그때마다 그의 예배드리는 목적은 동일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위하여”

(창 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이 구절은 조카 롯과 초목지 문제로 나뉘고 난 뒤에 이야기입니다. 롯은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소돔 땅 근처를 찾아 갔지만 아브라함은 여전히 가나안에 남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역시 예배의 목적은 동일합니다.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위하여”입니다.



예배는 여호와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위하는 존재가 바뀌어 있을 때가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예배를 받을 대상인 것처럼 예배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한 마음이 되어 있습니까? 그것보다는 내가 우선한 것은 아닙니까? 많은 성도들이 왜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 ‘은혜를 받았다 못 받았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 중심에는 자신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했느냐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오직 내가 덕을 봐야 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유익하면 은혜를 받았고 나에게 유익이 없으면 은혜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예배라는 용어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단에는 ‘프로스쿠네오’입니다. 이 말은 ‘절하다’ ‘엎드리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 하면서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나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예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드리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받는 것은 드림이 온전할 때 저절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드릴 것이 없이 받을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찬양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와서 나의 위로가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문제의 해결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다른 많은 종교는 자신이 우선입니다. 신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해 먹습니다. 자신이 잘 되기 위해 신을 섬깁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도 자신이 잘 되고, 남편이 잘 되고, 자식이 잘 되기 위함입니다.

(신 5:7-8) 『[7]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제 2계명입니다. 우상은 왜 만듭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목적이 무엇이라 나왔습니까? 자신을 위할 목적입니다.(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시간 예배드리면서 정말 깜짝 놀랄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섬긴다고 하면서 이 자리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자신이 잘 되고, 남편이 잘 되고, 자식이 잘 되고 하는 일은 관심이 없습니까? 잘못 되어도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잘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그것이 우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때에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이 시간이 하나님만을 위하는 자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의 자리에는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오직 영광을 받으실 주님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최상을 것을 올려드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 것입니다.



2.예배의 태도(요4:23-24)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신령이라는 말은 영으로라는 말과 같습니다.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예배시간에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영적으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합시다.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영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24절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도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



고전14:15절에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하였습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영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바른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의 영이 기뻐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진정으로’라는 말은 ‘진리로’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육신밖에 모르는 세상의 모든 가증한 것을 다 벗어버리고 오직 맑고 깨끗한 영으로 영적 세계에서 진실되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나오면서 육신의 것만 잔뜩 가지고 나오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 순서(요소)의 많은 부분이 인간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있습니다. 찬양을 할 때 나의 영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생각으로 찬양해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할 때 영이신 하나님 앞에 나의 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헌금을 드릴 때 육신적인 생각으로 드리면 안됩니다. 물질 자체는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내가 어떤 자세로 드리느냐에 따라 그것이 더럽게 되기도 하고 거룩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진실되게 드려져야 합니다.



3.예배의 내용 -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 중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 ‘주와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마다 하나님께 찬송되었습니다.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왕상 8:23)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시 86:8)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이 같은 표현은 천지만물 중에 하나님과 비교할 대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배가 Worth-Ship입니다. 그것은 ‘가치’라는 말과 ‘~됨’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즉 ‘가치매김’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누군가를 중요한 존재로 생각할 때 그에 해당되는 만큼의 가치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4장1절에서 15절에는 아벨과 가인의 제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가인을 분노했고 결국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느냐 거절하시느냐가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거부하셨습니까?

성경은 아벨은 양은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를 하는 자였다고 합니다. 즉 직업이 서로 달랐습니다. 각각 제사를 드릴 때 아벨은 양으로 드렸고 가인은 곡식의 열매를 가져다 드렸습니다. 양을 치는 자가 양을 드리고 농사하는 자가 소산을 가지고 드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즉 제물의 품목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질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1)가장 좋은 것을 드린 아벨 - 양의 첫 새끼

성경은 자세히 보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만 드렸다고 되어 있지 땅의 첫 소산을 드렸다는 말은 없습니다. 제물에 드려진 마음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첫 새끼라는 말에는 하나님께 대한 아벨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는 양을 구분했었고 그리고 또 계속 지켜봤을 것입니다. 어쩌면 첫 새끼를 때가 되어 드리기 위해서 따로 키웠는지 모릅니다. 그것에 비해 가인은 아무렇게나 가지고 온 것 같습니다. 준비되지 않는 제물을 가지고 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최고의 대상에게 최고의 것을 드리려고 함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그 예배는 바른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2)우리가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최고의 것 - 삶의 간증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최고의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최상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것으로 부족한 자신의 창고를 채우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으로 드린다고 한들 하나님이 가지신 것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의 가장 좋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다시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왜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왜 거절하셨는지를 봅시다.

아벨과 가인의 제사는 드려진 제물의 차이만 있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가 달랐습니다.

창4:4하-5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이 아벨에게서 받으신 것은 아벨이 바친 제물뿐만 아니라 아벨도 함께 받으셨습니다. 받으신 것의 순서를 보면 제물보다 아벨이 먼저였습니다. 그와 같이 가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가인의 제물만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도 거부하셨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아벨이라는 사람의 삶이 예배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이 의로웠습니다. 예수님은 아벨을 지칭할 때 마23:35에 ‘의인 아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의 삶부터 문제였습니다. 그의 삶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제물에도 정성을 기울이지 못한 것입니다. 요일312에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삶이 악한 자들의 무리와 함께 한 삶이었습니다.



제물은 항상 그의 삶의 결과입니다. 제물이 문제가 되기 전에 그의 삶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받고 싶은 제물은 우리의 삶입니다. 믿음으로 산 삶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며 불의를 보며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그의 회개시 시51:17에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산 한 주간의 삶을 가지고 나오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감사와 찬양이 감격으로 올려질 것입니다.



●53주일예배 성공을 위하여

우리는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서 ‘주일 예배서약’을 하였습니다.

1.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

2.2006년도 53주일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3.성실한 예배자로서 53주일을 온전히 바치겠습니다.

4.우리 교회 주일예배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요4:23)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께 발견될 수 있는 예배자입니까?

성도 여러분, 금년은 예배를 회복하고 예배부터 성공하시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주후2006-01-15)
주일오전예배 목록
번호 설교제목 설교자 설교본문 설교일자 조회
230 버림받은 아들 예수 마27:45~46 06.04.14 504
229 주님과 함께 죽읍시다 요한복음 11:11-16 2006. 04. 9 793
228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18-25 2006.4. 2 938
227 왜 전도해야 합니까? 로마서 1:16(구약 p239) 2006.03.26 861
226 홍해 앞에 섰을 때 성경> 출14:10-14 2006.3.19 880
225 "다윗 대 골리앗" 사무엘상 17장:31~50 (구약 436p) 2006.03_12 1009
224 신령과 진정(진리)의 예배 요한복음 4:21-24 2006.03.5 948
223 사울의 생애와 다윗의 생애 사무엘상15:17~29 06.02.19 887
222 사울의 생애와 다윗의 생애 사무엘상15:17~29 06.02.19 1712
221 영적성장의 목표 에베소서 4:11~16 (신약314) 06.02.12 608
220 "법궤 실은 벧세매스 암소처럼" 사무엘상 6:10-21(구약416p) 2006.02.05 961
219 "축복의 가정과 저주의 가정" 사무엘상 2:18-26(구약411p) 2006.01.29 1106
218 "보내는 선교사가 해야 할 것" 로마서 15:22-33(신약261p) 2005.01.22 1019
열람중 진정한 예배자입니까? 요한복음 4:19-26(신약149) 2006.01.15 850
216 "새사람" 에베소서 4:17-32(신약314p) 2006.01.01 770
게시물 검색

장산교회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