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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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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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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본향을 찾는 자들
성경> 히11:8-16
찬송> 533, 544장


● 민족의 명절 - 설날, 고향을 찾는 사람들
성도 여러분, 내일 모레면 구정 설날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곧 부모 친지를 찾아 고향으로 떠나실 분들이 있을 것이고 또 다른 곳에서 부모 형제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민족 고유의 명절이 있어, 고향을 찾아가고 또 헤어져 있었던 부모 형제를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는 일은 얼마나 정겨운 일이지 모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런 명절에는 고향의 부모 형제를 찾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사이 명절 문화가 많이 달라져서 명절 연휴를 통해 개인적인 시간이나, 가족끼리의 시간으로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 명절에는 집안 가족들은 함께 모이고 친척 어른을 찾아 인사하는 정겨운 모습이 우리의 명절의 모습입니다.
금년 설 명절에는 연인원 3천 34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다른 때보다는 귀성길 상황이 다소 좋을 듯하다고 합니다만 우리는 명절 때마다 '귀성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고역을 치르면서도 꼭 '고향으로 고향으로' 향합니다. 귀성길 교통 체증이 심할 때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혹 서울에서 광주까지 13~14시간을 차에서 보내면서도 고향으로 갑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이북 5도 실향민들 중에는 이번에도 임진각에서 멀리 북녘 땅을 바라보며 눈물지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의 고향은 단지 태어난 곳이라는 말로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한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은상씨가 작사하고 김동진 작곡 '가고파' -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어리네 꿈엔들 잊어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저도 이은상씨가 노래한 마산 합포구의 바다를 보며 4년동안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렇게 멋지고 정겹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아름다운 시구로 읖은 것입니까? 물론 아름답고 적절한 언어의 위력이기도 하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마산의 앞 바다와 이은상씨의 마음 속 고향 마을의 바다는 그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저의 고향은 부산 영도입니다. 군 입대를 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 곳 영도를 떠난 것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를 하면서였습니다. 그 이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영도를 가게될 때면 항상 시선이 머무는 곳은 제가 살던 고향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전에 한 번 혼자 지나는 길에 어릴 때 살던 집을 잠시 들렀습니다. 길도 집도 너무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번 명절에는 저는 부모님께 찾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춘계방학을 이용해서 인사를 다녀올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번 설 연휴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전에 제가 살았던 집과 자랐던 동네와 다녔던 초등학교에 갔다올 생각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향, 고향이 우리에게 어떤 곳입니까? 왜 우리는 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까?

성경에 보니 야곱은 애굽 땅에서 죽으면서도 자신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고, 그의 아들 요셉도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지만 죽을 때 유언하기를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다시 들어갈 때 자신의 시신을 함께 가져가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유언은 400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면서 이행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 성도의 진정한 고향, 천국
육신을 가진 각 사람에게 명절 때가 되면 찾아가는 고향이 있듯이 이 땅을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찾아야할 고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고향이라는 말과 구분해서 '본향'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향과 본향은 어원적으로 다른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곳과는 달리 본문 14절에는 '본향'이라는 말로 번역을 해 놓아 일반적인 고향을 의미하는 말과는 다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왜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습니까? 이제 어느 정도 길도 뚫렸을 것 같은데 빨리 고향으로 가지 않고요? 그리고 이 자리에는 이미 고향을 찾아오신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여러분은 지금 낯선 이 곳에 와서 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 우리에게 육신의 고향 외에 또 다른 본향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들
오늘 성경 말씀에는 본향 즉 고향을 찾아가려고 하면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지금과 같이 모든 사람이 다 고향을 찾을 때 찾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 성공하지 못해서입니까? 아니면 이북에 고향을 둔 사람처럼 실향민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13절에 "이 사람들은") 이들은 믿음의 3대 족장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입니다.(8-9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본향이라고 불려질 세 곳의 본향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15절의 말씀대로 나온 바 본향입니다. 둘째는 현재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입니다. 셋째는 16절 말씀대로 더 나은 본향입니다.

먼저, 나온 바 본향'입니다.(15)
나온 바 본향은 우리가 명절에 찾는 고향, 즉 태어나서 자란 곳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나온 바 본향은 어디입니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갈대아 우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네 친척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가나안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아는 친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들도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그 곳에 간 것입니다.
가나안에 아브라함이 살도록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땅과 집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이미 가나안 원주민들이 대대로 뿌리를 내려 살아오던 곳이었습니다.
무일푼으로 타향살이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얼마나 고생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왔지만 이 곳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라고 믿기에는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오면서 겪은 고생을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 명령을 받들고 가나안으로 오던 중 하란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창11:32) 객사한 것입니다. 인생사에는 사람들은 객사한 것만큼 불행한 죽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길가는 도중에 아버지의 죽음을 보게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고생은 또 얼마나 했습니까? 객지에서 무일푼으로 기반 닦아 살려하니 얼마나 고생이었겠습니까? 조금 가나안에 익숙해지려 하니 이번엔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디 죄짓고 할 수 없어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입니까? 이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객지 생활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하루에도 열 두번은 더 들었을 것입니다. 15절 말씀의 기록대로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요? 남자가 한 번 먹은 마음에 결단 때문입니까?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냐는 말입니다. "내가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 고향 땅을 밟지 않으리라" 결단한 것입니까?

● 믿음의 족장들이 가졌던 천국 믿음
믿음 때문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천국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천국 믿음을 가졌다' 이 말에 동의를 하십니까? 성경이 증언해 주는 바 아브라함이, 아니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삭과 야곱까지 모두가 다 천국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그곳이 그들이 영원히 살 곳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다가 뼈를 뭍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글면 그들은 이 가나안이 의미하는 바가 또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 믿음의 3대 족장들이 얼마나 철저한 천국 신앙으로 살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있는 육신의 정(情)까지도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천국을 사모하며 살았던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이방인처럼 삶
그들이 천국을 사모하면 살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9절 말씀을 잘 봅시다.

9절에는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 왔으면서도 외방에 있는 것같이 우거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왔으면 이제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 생각을 해야할 터인데 왜 그렇게 살았습니까? 10절에 그 이유가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으니 외방 사람처럼 사는 것이 당연하지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발붙일 곳 하나 없었지만 흉년으로 애굽을 다녀온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의 왕 바로에게서 큰 선물을 받아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는 조카 롯과 초목지가 부족하여 분쟁이 일어날 정도로 많은 소와 양떼가 있었습니다.
또 창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집에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조시대 유력한 대군이나 정승의 집에 무사를 데리고 무시못할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아브라함도 가신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군대를 대동하여 조카 롯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구원병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

부자가 되었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제까지 믿음으로 산 결과 드디어 부자가 되었으니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이다. 이제 이 약속의 땅에서 땅도 사고 집도 사고하여 이 약속의 땅에서 복받은 증거를 나타내며 보란 듯이 살아야지!"
그러나 그는 약속의 땅에서도 외방에 거하는 것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 따로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 장막에 거함
뿐만 아니라 그는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9절 하)
돈도 꽤 벌었고 이제 집에 318명이나 되는 가신까지 두었습니다. 제법 그럴싸하게 꾸며놓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왠 일입니까? 믿음의 족장들은 장막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장막 생활이 무엇입니까? 텐트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웬 텐트입니까? 텐트는 쉽게 치고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오늘이라도 여러분에게 '네 장막을 거두고 이제 오너라'하고 말씀하시면 미련없이 주님께로 갈 수 있습니까?
세상의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두고 떠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세상에 투자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전에 마산에서 교역을 하다가 임지가 부산으로 옮겨져 이사를 하려고 짐을 꺼내 보았더니 짐이 얼마나 많은지, 그 때 제가 산 아파트가 13평이었습니다. 밖에 다 풀어놓고 보니 이 많은 짐이 다 어디에 있었는가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 저희 집이 특별히 물건을 재 놓고 사는 집이 아닙니다. 살림이 왜 이렇게 많으냐고 말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이사하는 것 보면 버리는 물건만 해도 차 한 대 분량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세상에 마음을 둔 것들이 너무 많다는 말입니다.
예) 롯의 처

이제 곧 이사해야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사서 재 놓지 않습니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이사할 곳에 이것이 적절한지를 생각합니다.
며칠 전 아는 집사님 한 가정이 중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분은 자기가 정성스레 기르던 화초를 하나씩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저희 집에도 하나가 왔습니다.) 그리고 집의 에어콘도 다음 사람에게 그냥 주고 갔습니다. 중국에 이사 가는 것이 결정된 순간부터 집안에 가재도구를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이사할 사람은 짐을 많이 만들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의 것을 생각합니다.

● 이방인으로서의 증거를 나타냄
13절에는 이들이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을 했다는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증거하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증거하였다는 말은 표시를 내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스스로 이 땅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외국인입니다. 나는 나그네입니다"하고 말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입니다. 첫째는 스스로 그 말에 책임지는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 스스로 이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가끔 자신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내가 예수 믿는 사실에 대해 행위가 따르지 않느니 자신없어 부끄럽다는 말이며, 또 둘째는 그것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나는 예수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닌다면 그것은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을 분명하게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며 또한 그 예수 믿는 것이 좋다는 것의 고백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천국 시민이 너무 좋아 나팔을 불며 다녔고 또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또 시험이 들어 약해질 수 있으니까요.
예)최봉석(최권능) 목사의 예수 천당, 이성봉 목사의 천국 분점

● 더 나은 본향을 사모
그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더 나은 본향은 천국이었습니다.(16)

성도 여러분, 천국이 이 세상보다 더 나은 본향임을 믿습니까?
우리 속담에 "쇠똥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천국 갈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지옥 갈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들 자신이 이 땅에서 어떤 것을 누린다고 하여도 천국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지도 않으며 또 이 세상에 누리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안타까워하지도 않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이전에 천국을 경험하고 왔다는 사람의 간증이 한국 교회를 흔들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퍼시 콜렛이라는 박사입니다. 이 사람이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한 때 베스트 셀러였습니다. 요사이도 천국 갔다왔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있나 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말에 현혹이 되어 천국을 생각할 필요가 없고 단지 성경에 나타난 대로 천국을 직접 경험한 바울 사도의 표현을 통하여 감을 잡아 봅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12:1-4)

● 천국 본향 사모하며 믿음으로 산 사람들(13) - 믿음을 따라 죽었으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천국 믿음을 가지고 이 땅을 살다가 다 죽었습니다. 이들뿐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해 놓은 믿음장입니다. 본 장에 나타나는 그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이 다 이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니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약속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는 자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16) 바꾸어 말하면 자랑스럽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며 살지만 부끄러운 자녀도 있고 자랑스런 자녀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녀들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그리고는 '한 성'을 예비해 두신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보여집니다.
예)현신애 권사의 꿈

● 사라지는 천국 대망 신앙
우리나라 기독교 초창기부터 6,70년대까지만 해도 강단에서는 자주 주님의 재림을 가르쳤고 성도들은 천국을 대망하며 살았습니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이 신앙이 희미해졌습니까? 조금 물질적으로 누릴 것이 있어지고 살만하니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 만불시대가 되면 기독교는 쇠퇴해지고 교회는 점점 비어갈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정신차리지 않고 계속 세속에 빠지 주님의 재림도 생각지 않고 천국의 삶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물질을 거두어가고 우리의 삶을 6,70년대 이전처럼 곤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6,70년대 부흥회 때마다 부르며 은혜를 받은 '주님 고대가'입니다. 다시 한 번 새기며 주님 재림과 함께 천국 대망 신앙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 "주님 고대가"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심 오시는가해
머리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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