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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족보
  • 날짜 : 2005. 9. 18
  • 본문 : 마 1:1-17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영적 족보

성경> 마1:1-17

찬송> 96, 206, 249



●들어가면서 - 추석 & 족보

오늘은 주일이면서 민족 고유의 추석 한가위 명절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한가위는 일 년 중 우리 민족에게 가장 풍성하고 넉넉한 때였습니다. 오늘 특히 추석 한가위 명절을 주일로 맞은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영적인 풍성함에 육신의 넉넉함도 함께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많은 성도들이 부모님을 찾아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이번 명절 연휴는 다른 때보다 짧아 어쩌면 피곤한 명절이 될 것이라는 신문의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실망하지 말고 내년을 기대하라고 그러더군요. 내년 추석 명절 연휴는 거의 10일정도 될 거라는 겁니다. 징검다리 휴일이 두 번이나 끼어 있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하더군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명절은 정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명절 때만 되면 부모를 찾고 더 나아가 조상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는 어제 100mm가 되는 폭우가 내려 고향으로 향하는 차량의 정체는 더욱 심해 참으로 불편하고 피곤한 귀성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2시간, 14시간 아니 어떤 때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까지, 이런 고생마다하지 않고 부모와 고향을 찾은 것은 단순히 명절이라는 이유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민족 마음속에는 다른 민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혈연에 대한 깊은 애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만큼 혈연과 지연에 매여 있는 민족은 드물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 이런 명절을 맞이하면 한번 쯤 생각하는 것이 족보입니다. 생활형편에 관계없이 집에 족보책 하나는 구입해서 두고 있는 집이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인이 족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족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신앙적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성경적이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족보가 너무 많이 나와 있으니까요. 특히 창세기 같은 성경은 족보로 구성해 놓은 책이라고 해도 말이 됩니다.

그 외에 다른 많은 곳에도 우리가 성경을 읽기에 지겨울 정도로 많은 사람의 이름을 나열하여 족보를 밝혀 놓은 곳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한 사람을 소개할 때에 그 사람의 이름만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집안을 다 밝힐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말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3대를 밝히는 것은 기본이고 ‘**의 아들, **의 손자, **의 증손, **의 현손’까지 밝혀 놓은 족보가 많습니다.



그런데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 와서 첫 성경 마태복음을 열면서부터 또 족보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각각 그 대상자가 다릅니다. 읽을 대상자에 따라 같은 시기의 같은 사건이라도 그 강조점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이 그 대상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족보로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만큼 유대인들이 족보에 대한 생각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추석과 동시에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추석 주일에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족보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족보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더욱 의미 있고 자연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영적인 족보가 육신의 족보보다 훨씬 더 중요함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마1:1-17의 족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혈통을 정리한 족보입니다.

1:1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씀의 세계는 이 ‘세상’(world)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대’(generation)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새로 나온 성경에는 대부분 이 말을 ‘계보’, ‘족보’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핵심 메시지는 곧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족보는 성경에 기록된 족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족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족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족보를 이야기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나의 족보?

먼저, 우리는 이 족보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족보는 2000년 전의 유대인 예수님의 족보로서 기록된 것만이 아닙니다. 이제 이 족보는 예수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새롭게 주어진 영적 족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마친 이 족보가 그 이후 세대를 계속 기록한다면 오늘에 와서 그 족보에는 나도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질 때 예수님의 족보는 곧 나의 족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형제라 부르심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예수님이 부활 후에 제사들을 ‘내 형제’라 부르심.



이제 이 족보가 나에게도 얼마나 중요한 족보인지를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뿌리를 알기를 원하듯이 이제 이 예수님의 족보를 통하여 우리의 영적인 뿌리에 대한 확증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족보는 어떤 족보입니까?



1. 왕의 족보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왕의 족보입니다. 6절 말씀부터는 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 왕이 다윗입니다. 다윗 왕 이전에는 족장과 사사시대였기 때문에 왕이 없었지만 이스라엘에 왕정시대가 시작되고는 다윗 왕을 시작으로 해서 왕들의 이름이 계보를 잇고 있고 이 계보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향하여 부를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면 우리 모두가 다 왕족입니다. 그는 우리의 맏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맏아들!



그러므로 우리는 다 왕의 자녀들입니다. 유치부, 유년부 아이들이 부르는 찬송에,

♬ - “난 난 난 난 나는 왕자다. 주님 나라에 나는 왕자다… 난 난 난 난 나는 공주다 주님 나라에 나는 공주다”

이것은 바르고 정확한 고백입니다.



2. 믿음의 족보입니다.

그러면 이 족보에 분명히 들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족보에 들 수 있는 조건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혈통으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에 들 수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이스라엘 왕가의 족보가 아니었습니다.



1)족보의 시작 아브라함.

족보의 처음 시작이 아브라함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도 예수님의 족보가 나와 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역으로 올라가는 족보입니다. 그 족보의 맨 마지막은 아담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역시 예수님의 족보를 시작할 때 아담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내려오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담보다 아브라함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담이 없는 아브라함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을 그들의 조상으로 여기기보다는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왜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민족이냐?’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군으로부터 시작하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것 사실입니까? 나라마다 그 나라의 그 민족의 뿌리가 있어야 하니까 그냥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분명한 역사적인 인물이 그들의 시조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었습니까? 믿음으로 새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향은 지금의 이라크 지경 내에 있는 갈대아 우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수24:2) 그곳에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가 지시하는 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가나안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 나는 안 갑니다. 나는 그냥 여기에 살겠습니다. 정든 내 형제와 가족, 그리고 내 고향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11:8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가문이 가나안에서 시작되었고 그 가문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역사, 섭리 가운데 사는 특별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민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뭐냐?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도 믿음 때문에 나의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을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예1)나의 경우 - 명절 때만 되면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도 못 올라가서 죄송합니다. 항상 저만 빠지죠?”하고 말하면, 부모님은 “그래, 교회가 더 중요하지.”라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받는 느낌은 서운함을 느껴지는 것입니다.

특히, 둘째 형님의 경우에는 목사가 부모를 더 잘 섬겨야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코너를 몰아넣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가까이 있어 잠시면 다녀올 수 있는 곳에 계시면 괜찮겠는데 인천이니 갔다하면 3일을 잡아야 그곳에 온전히 하루라도 있을 수 있어 쉽지가 않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제사로 인해 고민하며 기도하는 성도들 있는데, 그리고 신앙 때문에 명절이 즐겁지가 않고 더욱 괴로운 성도들도 있는데 함께 기도해야 할 시기에 내 부모 챙기겠다고 자리 비워 다녀오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것도 잘 하고 저것도 잘 하면 더욱 좋지만, 두 가지 일이 갈등을 일으킬 때에는 적어도 목사의 위치라고 한다면 할 수 없이 가족을 뒤로 하고 성도들을 돌아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4:21-22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만 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부친도 버려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2) “내 아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인데요!”



2) 족보에 든 여자들

또 하나, 본문의 예수님의 족보에는 특이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계중심의 사회였던 유대사회에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족보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 족보에는 마리아를 제외하고 4명의 여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은 이 네 명의 여자들 모두 온전하지 못한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3절에 다말, 5절에 라합, 또 5절에 룻, 6절에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정말, 한결 같이 문제 있는 여자들입니다.

다말은 오늘 우리의 윤리와 도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여자입니다. 그는 자손의 대를 잇기 위해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아이를 낳은 여인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라합은 또 어떻습니까? 그녀의 이름 앞에는 항상 ‘기생’이라는 말이 따라 붙습니다.(수6:17) 율법에는 기생을 부정한 여인과 함께 취급해, 기생을 취하지도 말고(레위기21:7) 자신의 딸을 기생으로 만들지도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레위기19:29) 그런 유대 사회에서 라합이라는 여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버젓이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또 룻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방여인입니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여인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결혼한 여인 아닙니까? 그녀는 재혼을 통해 새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를 통해 아기를 낳았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어떻습니까? 그의 이름은 밧세바입니다. 그녀는 더 골치 아픈 여인입니다. 대낮에 목욕을 하다가 왕의 눈에 띄어 남편을 죽게 한 여인입니다. 물론 더 나쁜 사람은 그를 취한 다윗입니다만 밧세바 자신이 조금 더 조신하게 처신하였더라면 이런 엄청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죽게 만들고 또 다윗과의 불윤의 관계 속에 난 아들을 죽게 만든 여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대체 왜 예수님의 족보에 이런 사람이 끼어 있어야 합니까?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닙니까? 그런 일이 혹 있었더라도 족보를 정리할 때에는 이런 부끄러운 이름은 빼버리고 기록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입니다. 특히 성경의 기록을 보면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는 건너 뛴 족보도 있습니다. 할아버지에서 바로 손자로 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기록 안 해도 될 여자들까지 애써 기록하면서 이런 추함을 드러낼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자격에  그 어떤 제약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 꼭 왕족이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왕족이라고해서 그 족보를 보니 그것도 다 그렇고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불륜의 자식들도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시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도 예수님의 족보는 이어져갔습니다. 그의 직업이 기생이라도 관계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너 이전에 뭘 했느냐? 그것 내가 따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 세상 살다보면 실수로 그럴 수 있고, 몰라서 그럴 수 있고, 한 때는 정말 죄짓는 줄 알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우리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족보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자신 없어 할까봐서 말입니다. 내가 내 족보 때문에, 내 가문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할까봐 예수님이 아예 이 세상에 그렇게 천하디 천한 족보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내가 너의 마음 다 안다.” 네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 때문에, 이미 저질러 놓은 너의 실수 때문에. 잘못 알고 간 바로 그 길 때문에 네가 어찌할 바 모르는 그 마음을 내가 잘 안다. 너나 나나 족보가 같지 않니. 그게 그것 아니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자녀의 길을 활짝 다 열어놓으셨습니다. 나 같은 자도 하나님의 거룩한 족보에 두시려고 자신이 낮아지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3)그러나 믿음만은 꼭!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이 족보에 들어가기 위해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관계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는 이 족보에서 분명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신분의 빈부귀천은 관계없으나  믿음이 없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분은 따지지 않겠다. 그러나 믿음 없는 것을 내가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믿음의 족보입니다. 이 여인들 다 천한 면이 있었지만 그들의 행위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다말,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을 저질은 여인이지만 그의 중심은 믿음의 대를 자신에게서 끊기게 할 수는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라합, 역시 그는 믿음으로 자신의 성내에 들어온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것입니다. 그녀의 신분을 천했을지 모르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룻, 그녀는 모압의 이방여인이었지만 유대인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철저한 신앙인이었고 그녀는 남편을 잃었지만 시어머니의 여호와 신앙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신 새 믿음의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남자로부터 예수님의 족보를 잇게 된 것입니다. 신분이 천했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큼은 정확하고 분명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성경에 그 추한 여인을 이렇게 귀한 족보에 기록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분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전에 우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 안민 장로님이 그의 학교에서 유행시킨 말이 하나 있습니다. “공부도 못하면서 기도도 안하냐?”입니다. 가정사역을 하시는 송길원 목사님이 이 말을 그대로 이용해서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얼굴도 못났으면서도 웃지도 않냐?” 제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집안도 별로면서 믿음도 없냐?”



도대체 뭘 믿고 사느냐는 겁니다. 지난 날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내 모습이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 말해보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라도 믿음으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왕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우리를 두신 것은 믿음으로 세상을 보고, 믿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반여동 산비탈에 산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내리막 비탈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계를 가슴에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의 자녀가 아닙니까?

대부분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로마를 정복하고 세상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믿음이 들어가니 그들은 갈릴리 동네의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부흥사요 전도자였던 드와이트 무디와 인도의 선교사 윌리엄 캐리는 모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두만 보고 살지 않았고 미국을 마음에 두었고, 인도를 마음에 두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진들도 다 이것으로 증거를 얻었습니다. 별 것 아닌 자들이 믿음으로 살기로 작정하니까 나라를 이기기도 했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자기의 아들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인 하나님 앞에서의 영광을 생각하고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맺으면서

혈육의 정을 피부에 더욱 느낄 수 있는 오늘, 우리는 오늘 주일 이 자리에 모여 우리의 영적인 족보를 확인 확증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왕의 자녀입니다. 왕의 자녀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자녀입니다.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왕의 자녀로 믿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 때 살 맛이 나는 자들입니다.-아 멘-(주후2005-09-18,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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