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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감사로 드리는 제사
  • 날짜 : 2005. 7. 10
  • 본문 : 요나 2:1-9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감사로 드리는 제사

성경> 요나2:1-9

찬송> 28, 430, 432장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맥추감사주일의 현대적 의미는 상반기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보리를 추수하는 농경시대와 문화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한 해의 절반은 맥추감사로, 또 다른 남은 절반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추수감사로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이 반이라면 그 반을 마친 시점에 진실한 감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은 모든 기간을 더욱 큰 감사로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법칙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불평 역시 불평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상반기를 지나는 우리에게서 진정한 감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남은 우리의 삶에서도 감사가 넘쳐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예배드리는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가장 예배다울 때는 언제이겠습니까? 그것은 예배의 본질과 핵심이 분명할 때일 것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이 외식적인, 형식적인 찬양이 아니라 진정한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시간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이 한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난 한 주간 동안의 우리의 삶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삶의 예배를 가지고 우리는 주일날 이렇게 모여 감사의 보따리를 풀어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지난 한 주간 동안 얼마나 감사의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예배는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감사의 삶은 우리의 예배의 질에서부터 우리의 삶의 풍성함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통하여 우리의 감사의 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 중 한 사람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엉뚱한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요나는 이방인의 성 니느웨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가 탄 배에서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켜 그는 지금 물고기의 뱃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2:1)

그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요나는 크게 징계를 받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감사했어야 하는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지금 가장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것은 요나가 감사를 회복하자 하나님은 요나의 삶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2: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감사를 회복할 때에 우리의 인생도 회복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아울러)



1. 감사할 수 없을 때에도 감사합시다.

성경 말씀에 ‘감사하라’는 명령이 35번 ‘감사’라는 단어는 180번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감사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만 명령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감사할 상황이 아닐 때에도 감사를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범사’는 모든 일입니다. 그 속에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행복할 때에도 괴로울 때에도, 일이 잘 될 때에도 잘못 될 때에도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몰라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뜻도 마음에 새겨 지키지 못하면서 불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구하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입니다.

예수님께서 눅6:32에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시켜봅니다. “너희가 만일 즐거울 때에 감사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세상 사람들도 즐거울 때는 감사할 수 있느니라”



여수에 어느 집사님의 부친의 장례식 때문에 갔다가 이전부터 한번 가보려고 했는데 가보지 못했던 여수 애양원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그 곳에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고 손양원 목사님이 목회하셨던 나환자 교회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가 순교하기 전 먼저 그의 두 아들, 동인이, 동신이가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 공산당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큰 아들 동인이는 미국 유학 준비 중이었고, 동신이는 주의 종이 되겠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공산당원의 총부리 앞에서도 회개하고 예수믿으라고 복음을 전하며 죽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바로 앞에 여수 앞 바다가 보이는 동산에 그들의 부모와 함께 누워있었습니다. 애양원교회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니 무덤이 있어 잠간 보고 그 옆에 있는 기념관에 들어갔습니다. 기념관에 손양원 목사님이 아들들의 장례식에서 답사를 한 내용이 기록된 글을 보고 한 마디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나오면서 다시 그 무덤 앞에 서니 들어갈 때 잠간 스쳐본 무덤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성자 같은 목사님이셨지만 그의 아들, 그것도 한 아들이 아니라 장남, 차남이 함께 죽은 사건입니다. 손 목사님은 이렇게 답사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오.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은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자에게 나타나는 열매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불평, 실망, 좌절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쟁이들이 감사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저녁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실 노록수 선교사님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진해 모 교회가 특별새벽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별새벽기도면 이전에는 잘 나오지 않는 사람도 ‘특별’자가 붙었으니 나옵니다.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교회당 안이 모인 그 자체로 은혜가 충만한 것 같아 목사님이 흐뭇해하며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스런 분위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남자집사님이 새벽기도를 나와서 기도하고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목사님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집에서 잠을 자다가 죽었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게 웬일이냐며 원망이 나올 판에 새벽기도를 나와서 그것도 교통사고로 죽었으니…

그 교회 목사님은 사람이 죽은 것은 별 문제이고 그의 부인 집사님이 제일 먼저 걱정이 되고, 이어서 이 문제로 교회가 시험 들지 않겠나하는 우려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런 걱정에 목사님이 특별새벽기도를 진행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특별새벽기도 기간 중에 장례도 치렀는데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의 부인이 장례식에서 많은 조객들에게 하는 인사말 한 마디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특별새벽기도는 더욱 큰 은혜 가운데 끝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집사님이 무엇이라 말했는지 아십니까? 목사님이 생각하던 정 반대로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집에서 잠을 자다가 죽었어도 천국 갈 것이니 감사한 일이지만 새벽기도를 안 하던 사람이 새벽기도를 시작하고 새벽기도회에서 은혜 받고 그날도 새벽기도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으니 이것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간증한 것입니다. 목사 믿음보다 집사 믿음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성도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은 때에도 감사하는 자입니다. 반면에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불평입니다. 나에게 현재 감사가 넘치는지 아니면 불평이 넘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나의 영적 상태를 충분히 점검할 수 있습니다.



2. 감사로 더 큰 감사의 조건을 만납시다.(마13:12)

영국의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목사님은 “감사는 산수에서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있는 자는 받아 더욱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법칙이 감사와 불평의 법칙에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두 마을이 있었습니다. 한 마을은 감사촌이고 다른 한 마을은 불평촌이었습니다. 불평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불만이고, 무엇이든지 근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매사에 분노하고 또 좋은 일이 일어나도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 걱정했습니다. 불평촌 사람들은 주소가 그 동네이고 또 모두 불평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사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감사했습니다. 고생을 해도 감사하고 또 시련을 받을수록 감사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습니다. 봄에는 꽃이 피는 것에 감사했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것에 감사했으며 가을에는 추수하는 것에 감사하고 겨울에는 나뭇가지는 앙상하지만 그 뿌리가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하루는 불평촌에 사는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 왔다가 감사하는 소리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감사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범사에 감사하다가 저녁이 되어 불평촌으로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이, 감사촌에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감사만 하고 왔네”

불평촌으로 돌아와 금방 감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우리 교회는 감사촌입니까 불평촌입니까?



인도에 “호랑이를 왜 만들었냐고 하나님께 투정하지 말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감사는 긍정적인 생각에서 나옵니다. 고난도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으로 생각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헬런 켈러 여사는 “나의 약점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합니다. 이를 통해 나를 알고 내게 주어진 일과 또 내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고 말했습니다. 헬런 켈러의 감사는 더 큰 감사의 자리로 이어져 결국 그녀는 정상인들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동일하게 바울이 이같이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그 많은 조건을 불평 하나로 가려버리고 전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평은 사단이 성도를 공격하는 최첨단 무기요 우리에게는 가장 경계해야 할 적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더욱 큰 감사를 낳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감사도 눈에 들어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감사의 사람이 됩시다!



3. 은혜 받아야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합3:17-19)

그런데 이 감사가 하려고 한다고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말씀을 받고 내가 이제부터 감사하며 살아야지 각오를 단단히 한다고 감사가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의지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사가 눈에 보여야 감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동일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떤 사람은 감사의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은 불평의 사람이 됩니까?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간 12명의 정탐꾼의 보고는 왜 그렇게 차이가 났습니까? 10명의 정탐꾼은 이제 소망이 없음을 인하여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은 은혜를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감사가 노래 제목이 되지만 은혜가 없는 사람은 불평이 그의 제목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은혜 중에 있습니까? 은혜가 충만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감사도 충만 일 것입니다.



합3:17-19에는 하박국 선지자의 찬송으로 하박국서가 마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의 조국의 암울한 현실과 미래를 보며 극한 좌절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찬송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를 그의 찬송에서 볼 수 있습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

그가 비참한 현실에서 발견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그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 어떻게 찬양하는지 보십시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게 과연 없는 자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앞선 말씀에서 나눈 손양원 목사님, 아무리 나환자들을 사랑하여 그들과 함께 한 목사님이시지만 자신의 아들들의 죽음 앞에서 그가 처음부터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두 아들이 죽을 바로 그 때에 애양원교회는 이인제 전도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고 있었던 기간이었습니다. 부흥회 기간 중에 바로 목사님의 두 아들들이 죽은 것입니다. 손목사님은 충격을 받아 정신을 못 차리고 비통해 하실 때에 이인제 전도사님이 손목사님의 어깨를 세게 탁 치며 호통을 쳤습니다. 두 분은 평양신학교 동기동창생이었습니다.

“손 목사, 정신차리시오. 우리는 과거에 감옥에서 순교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교를 허락하지 않으셨소. 오늘 이 젊고 아들다운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친 것이 그리도 아깝소? 슬퍼하기만 할 일이 아니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요”

이 말씀을 듣고 손 목사님은 마음속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손 목사님이 은혜를 회복하지 않았다면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면 그의 심령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지 않았다면 그도 원망의 조건 속에 파뭍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식의 문제 앞에 자유로운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은혜의 밝은 빛이 그 상황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보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감사와 불평은 전념이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의 회복은 곧 삶의 회복입니다.

시50:23 말씀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제사가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2005년 지난 6개월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시고 더욱 큰 감사로 삶의 회복을 이루기 위해 은혜의 보좌에 끊임없이 나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주후200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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