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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초보를 벗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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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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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의 초보를 벗어납시다.
성경> 히5:11-6:2
찬송> 470, 408장


●한상동 목사님의 일화
세상에 힘든 직업이 많지만 목사도 직업 중에 하나라고 한다면 이것도 참 힘든 직종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목사가 해야하는 일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설교인데 그 설교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힘든 것만큼 보람있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서울의 내수동교회를 담임하셨던 박희천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총신대학에서 설교학을 가르쳤던 분인데 이전에 그 목사님을 모시고 동기회 세미나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박희천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 때, 부산 남 교회를 섬겼는데 그 때 담임목사님이 우리 교단을 창설하셨던 한상동 목사님이시라고 합니다. 주일 날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잠깐 쉬고 있는데 한 목사님이 찾아왔더랍니다.
"박 조사님, 계십니까?" 어찌 새벽 기도 마치고 집으로 가셔서 주일 낮 예배를 준비하실 분이 무슨 일인고 생각하면서 얼른 문을 열었습니다.
그 때 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박 조사님, 오늘 내 대신 설교 좀 할 수 없겠습니까? 밤 새 설교를 준비했는데도 잘 준비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영적인 대 스승인 한상동 목사님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는 한 목사님이 정말 솔직하신 분이다.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도 강도사님이나 전도사님에게 부탁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솔직히 말하면서 부탁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준비되지 않는 설교를 가지고 아무렇게나 설교단에 올라가느니 전도사님의 준비된 설교로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설교가 그 영적 거장에게도 그렇게 어려웠는가?'하는 생각입니다.
분명, 설교를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다른 일보다 귀중한 일이지만, 그 한 편의 설교를 완성하기까지는 정말 뼈를 깍는 영육의 고통이 따를 때가 자주 있습니다.

설교가 왜 어려운가? 그것은 학교의 강의와 달리 매주 새로운 것을 전해야한다는 부담이 있고, 또 설교는 세상의 지식이 아니라 영적인 면을 다루는 것이기에 설교자 자신이 영적으로 풍성해지지 않으면 설교를 잘 준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목회는 가만히 앉아서 묵상하고 연구하는 시간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써야하는 경우가 많아 영성이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또 설교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단번에 전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식의 유무에서 차이가 나고, 또 연령도 중학생부터 연로하신 어른들에게까지 다양하고 신앙의 정도도 다릅니다. 도대체 어느 층에 중심을 두고 말씀을 전해야할까 하는 것부터 고민입니다.

●듣기 쉽게 전해야 하는 부담
그래서 항상 설교를 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목회 선배들이 말씀합니다. '쉽게 하는 설교가 잘 하는 설교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쉽게 하면 설교를 못 알아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가급적 설교를 쉽게 하려고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 모든 성도들을 다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저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하였습니다. "설교 때문에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있지 마라. 그러면 설교가 어려워진다." 성경 연구를 너무 깊이 하면 설교자는 은혜 받지만 성도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을 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훌륭한 설교는 오래 시간 연구하고, 깊이 묵상된 가운데서 쉽게 하는 설교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저에게도 그것이 숙제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설교를 왜 쉽게 해야한다고 말합니까? 사실은 성도들의 수준이 낮기 때문입니다. 깊은 영적인 체험도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도 성경을 펴 본적이 없고, 진지한 기도의 무릎을 꿇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설교한다는 것이 과연 쉽겠습니까? 한 주간 동안 영적인 것은 별 관심도 없었고 지극히 육신적인 것에 매여 살아온 사람들에게 신령한 말씀이라고 소개하면 귀에 잘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니 설교자는 어떻게 하면 깊은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설교자들이 세상적인 것에 정보가 밝지 않으면 효과적인 설교를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관심사를 설교단에서 말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설교자는 항상 이 부담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제가 설교학 강의 시간도 아니고 왜 이런 설교의 어려움과 쉽게 설교해야하는 것에 대한 설교자의 부담을 말씀드리는 것입니까?

●영적인 답답함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어떻게 하면 알기 쉽게 본문의 말씀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접근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이런 설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5: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누구인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구약에 능통한 아볼로라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나바라고도 합니다.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11절의 말씀을 보니 이 히브리서의 저자는 지금 답답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저자는 잘 말해오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유대 기독교인 즉,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받아들여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더하기 위해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더 위대하다. 예수님은 여호수아보다 더 위대하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 이제 예수님은 대제사장 아론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을 하다가 말이 딱 막혀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초대 대제사장직 아론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을 언급해야겠는데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것이 이 사람들의 형편이었습니다.

본래 이 말씀은 히5:10에서 바로 7:1로 옮겨가면 되는 구조입니다. 이 두 구절을 서로 연결시켜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멜리세덱이라는 사람을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실제적인 이야기는 잠시 중단된 것입니다.
저자는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좀 더 설명해주기 전에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있던 답답한 마음을 확 풀어놓아 버립니다. 그것이 5:11-6:20입니다.

●영적인 유아 상태
이 부분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나 지금 답답해 못 견디겠다!'입니다. '너희들, 제발 영적으로 빨리 성숙해져라!'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런 상태의 사람들에게 동정적이기보다는 그들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단단한 식물: 성경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나 교리. 깊은 영적 수준의 체험이나 경험)

쉽게 말하면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들아, 너희들이 신앙의 연조가 어떻고 말하지만 실제로 너희의 현 수준은 영적인 유아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성경에 표현되어있는 대로 말하면 이들은 말씀의 초보 단계를 배워야하는 자들입니다.(12) 그런데 이들이 이 신앙의 초보 단계를 배우지 못한 자들이 아닙니다. 12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그들은 이전에 배웠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것을 배워야할 필요가 생겼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들의 신앙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내내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월은 분명 흘렀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내내 그 자리라는 말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매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만 말해 주어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년에도 심방가서 그 말씀을 드렸는데 금년에도 또 그 문제입니다. 매일 그것만 하다가 천국 가시게 될 분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답답함이 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도 흘렀는데 왜 그렇게 있느냐는 말입니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내내 그렇고 그렇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 여러분들에 대한 답답함을 하나님이 여기에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젠가 저젠가 또 한번 기다려보는 하나님의 인내가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바뀌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2002년, 금년 한 해는 좀 달라져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목사로 봉사하던 교회에 7년만에 다시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어 부임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한 집사님 집을 가는데 그 집의 7년 전의 형편을 잘 알기에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하면서 그 집의 골목을 들어서는데 주변의 집들이 7년 전과는 너무 많이 달라졌더랍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의 집도 달라져 있을 것을 기대하고 들어서는데 그 집사님의 집만 이전과 그대로 있더랍니다. 오히려 그 집사님 집 하나 때문에 주위에 잘 지은 집에 피해를 주느 것 같더랍니다. 참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을 심방하면서 그 집에 또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7년 전에 그 밋밋하던 집사님의 신앙이 여전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마음속으로
"너 신앙 생활하는 꼴을 보니 안 변한 게 당연하지. 변했다면 그게 바로 기적이다"라고 말이 목까지 나오는 것을 꾹 참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면서 몇 가지 권면을 하는데 집사님의 반응에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결국은 이런 말이 터져 나오고 말았답니다.
"집사님, 그럴 밖에야 교회 그만 둬요! 주위 사람들이 집사님을 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줄 알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2년 금년 한 해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신앙의 초보를 벗어나야 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내내 그 자리에서 맴돌았던 우리의 신앙 생활의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금년은 더욱 영적으로 성숙하는 한 해가 됩시다.

●은혜의 깊은 세계로
오늘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일사천리로 설명해 가던 저자가 잠시 그 논지를 중단한 채 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수준의 차이 때문에 느끼는 답답함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지식과 영적인 경험의 수준으로 계속 설명해 나가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영적인 깊은 세계에 대해 소개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느껴진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봅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영적인 유아들은 경험할 수 없는 영적인 깊은 세계가 있는데 그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엄두도 못내는 사람들이 안타까워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알지 못했고 경험해보지 못한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빨리 자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했던 그 세계를 누리며 체험하며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 생활이 모두 다가 아닙니다. 은혜의 깊은 바다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번 체험하면 우리의 영적인 수준이 달라집니다. 그것을 한 번 경험하면 우리의 인생 길이 달라집니다. 그것을 한 번 보면 우리의 비전이 달라집니다.

누가복음 5장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다른 곳도 많이 있을 텐데 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고 했을까?
그것은 은혜의 깊은 곳을 사모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얕은 데 그물을 내리면 그 수준의 고기 밖에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깊은 곳은 또 다른 고기들이 모여있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베드로는 너무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인생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놓으신 은혜의 놀라운 세계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더욱 사모하고 깊은 데로 가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08장 2절에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 보나" 3절은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조려서 못가네"

항상 신앙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 그게 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깊은 신앙 세계의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겁내지 말고 한 번 그 바다로 뛰어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고전12:31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결단과 위탁에서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 수준이 왜 그렇게 자라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왜 나의 믿음은 작년이나 금년이나 매 한가지며, 3년 전이나 지금이나, 5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 것입니까?
그것은 항상 현실이라는 문제에 얽매여서 믿음의 결단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 결단을 해 보신 분들은 있을 것입니다만 실제로 그 결단대로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신앙을 잃어버린 기억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믿음은 결단의 연속이며 그 결단한 대로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는 말은 세상의 요구에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결단을 하는 것을 말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쉽게 믿음을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믿음이란 모험이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의 측면에서 볼 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모험일 수 없고 항상 안전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하니 모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 모험을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벧전5:7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염려를 주님께 맡겨 버리면 하나님이 권고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돌아보시는 것입니다.
출14:14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해 보겠다고 모든 것을 다 하면 하나님이 하실 게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이제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실 구원의 역사를 지켜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 편으로 결단하지 못하거나, 결단하였다고 하더라도 최종 단계에서 돌아서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들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도 분명해졌습니다. 현재로서는 더 이상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없습니다. 단지 그 사람의 결단과 위탁만이 남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고 또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는데 나는 지나간 삶을 또 그렇게 붙잡으니 하나님의 새 일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돈을 벌면 얼마를 더 벌 것이라고 그것에 매여 있는지요. 그래서 얼마나 부자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떠나 즐기면 얼마나 더 즐길 수 있다고? 그래 하나님의 뜻을 뒤로한 채 즐기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습니까?
예화) 조금숙, 조재규집사의 간증

●신앙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곳을 향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1-2의 말씀을 요약하면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 나아가자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 그 초보 단계에만 머물러 발전이 없냐는 말입니다. 더 완전한 데, 즉 성숙한 신앙의 자리에 이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보를 이제 벗어납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나는 주님이 허락하신 저 깊은 은혜의 바다를 다녀보는 그 아름다운 신앙 생활을 기대해 봅시다.
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영적인 진보를 나타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또 한 단계 높은 신앙의 단계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곳에서 예비 되어 있는 또 다른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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